▶교회사업/교회증언 3.4.권

교회증언 3 권 // 교회증언 3권의 시대적 배경

동심초(남양주) 2022. 3. 4. 21:51

 교회증언 3권의 시대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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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증언 3권의 시대적 배경  

 3  1872년, 교회 증언 3권의 첫 번째 증언이 기록될 당시에 제 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 회의 모든 역량은 미국, 그것도 주로 중부와 북동부의 주들에 집중되어 있었다. 안수와 신임서를 받은 목사 86명이 기별을 전파하며 사업을 지도하고 있었다. 우리 교회는 출판소 하나와 작은 의료 기관 하나를 소유하여 운영하고 있었는데, 두 기관 모두 미시간 주 배틀크릭에 있었다. 사반세기 동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연합을 유지하면서도 지적인 면에서 최대한 신속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 우선 그들은 말씀 속에 교훈되어 있는 교리들을 분명히 이해하게 되었고, 다음으로 그 기별을 출판해야 할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 후에 교회를 조직한 뒤 더 나은 생활양식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발전으로 이어질 새로운 경험과 위대한 기회들이 여전히 교회에서 남아 있었다. 교회 증언 3권의 권면들을 통해 이런 발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지극히 중요한 시기였던 지난 25년 동안, 제임스 화잇은 새로운 사업의 지도자 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출판 사업을 시작했고, 지치지 않은 열심히 교회 조직을 위해 수고했으며, 의료 사업을 일으키고, 행정과 편집 방면에서 앞장섰다. 그는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었다. 사업에 대한 예리한 선견지명과 성장하는 교회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겸비한 그는 유일한 지도자인 것처럼 인식되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성장하고 있는 교단의 여러 사업에 참여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본서는 이 문제에 관한 논의로 시작해서 본부의 업무를 책임자들이 나눠짐으로 무거운 짐에 짓눌린 제임스 화잇을 구출해 달라는 호소를 앞부분에 담고 있다. 본서에는 사업의 확장, 책임의 증대, 젊은이들이 책임을 감당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내용이 거듭거듭 언급되어 있다. 한 사람을 위대한 지도자로 바라보는 일의 위험성도 명백하게 설명되어 있다.

 

 4   교회가 이 식에 겪은 경험은 새끼에게 나는 번을 가르치는 독수리의 경험과 유사하다. 어미 독수리는 먼저 어린 새까를 등에 업고 날다가 다음에는 제 힘을 기를 수 있게 내버려 둔다. 그러나 필요할 때 도와주기 위해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 제임스 화잇은 자신의 건강 약화, 책임을 나눠 지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참여해야 한다는 확신, 다른 곳에서 임무를 수행해 달라는 빈번한 초청 때문에 배틀크릭에서 행정에 관하여는 일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화잇 목사 부부는 본부가 위치한 도시의 요양원과 출판소 중간에 있는 자택을 계속 소유하고 있었지만, 집에서 먼 곳에 머물렀던 경우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1872년과 1873년 여름에 그들은 콜로라도 산악 지대에서 휴식기를 가졌으며, 캘리포니아에서도 몇 개월을 보냈다. 1874년에는 좀 더 오랜 기간을 서부 해안에서 지냈는데, 이때 화잇 목사는 영문 시조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본부에서 지도자의 책이을 질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사업은 활기를 얻게 되었다. 이 시기는 중대한 때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교회기 지도력 조직 문제와 관련하여 방법을 모색하는 동안, 개인의 독립성을 과도하게 강조하여 적법하게 임명된 권위에 반기를 들어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경험을 반복하는 위험에 빠진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3권에는 이러한 경험의 시작부터 끝까지 단호하고도 지속적인 영향력을 끼친 권면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여러 곳에 조직과 지도력에 관한 대원칙들이 훌륭하게 진술되어 있다. 본서의 배경이 되는 3년의 기간은 건강 개혁을 가르치고 실천하기 시작한 첫 10년이 마감되는 때였다. 극단으로 치우치는 한편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다른 한편을 막기 위하여 권면의 말씀이 주어졌다. 거듭해서 대중들을 향한 기사의 특정 개인에게 보낸 권면들을 통해서 엘렌 화잇은 절제와 올바른 생활의 대원칙들을 지적하고, 교인들에게 새롭고 유익한 건강 개혁의 체험 가운데 전진하도록 호소했다.

 

 5   이 모든 일은 광범위한 확장을 위한 초석을 놓는 작업이었다. 신자들이 전 세계를 일터로 깨닫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이는 어마어마한 관점이었으며 큰 도전이었다. 그들은 구들로에 H. 벨(Goodlde H, Bell)이 배틀크릭에서 시작한 작은 교회학교의 중요성을 그 당시에 깨닫지 못했다. 벨은 요양원에 환자로 이을 때 재림 신앙을 접하고 받아들인 노련한 교사였다. 그가 이 학교 사업을 시작한 때가 바로 1872년 초여름이었다. 이후 같은 해에 교역자가 양성하기 위한 상급 학겨 설립에 관한 계획이 시작되었다. 12월에 증언 22호가 교인들에게 전달되었는데, 그들은 교회학교와 기관의 운영법에 대한 호소를 증언이 시작되는 것을 발견했다. "올바른 교육"이란 제목 아래 30쪽을 걸쳐서 우리 청년들을 양성하는 것에 관한 위대하고 근본적인 이상이 제시되어 있다. 우리 교육 사역 없이 어떻게 세상에 우리의 기별을 두루 전할 수 있겠는가? 학교 없이 어떻게 교육 사역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올바른 교육" 부분에 매우 명백하게 제시된 교훈에 유의하고 그 도전을 받아들인 우리 선조들은 배틀크릭 대학을 필두로 교육 기관을 설립했다. 대학의 본부 건물은 1875년 1월 4일에 헌당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수개월 전에, 지도록 있는 목사 중 하나인 존 N. 앤드루스(John N, Andrews) 목사가 유럽에 기별을 전파하기 위한 개척자로서 스위스에 파송되었다. 파송  몇 개월 전에 권면을 통해서 엘렌 화잇은 "신중하고도 주의 깊은 태도로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서 타국으로 가야 할" 선교사들이 필요성에 대해서 기록했다. 1874년 가을, 앤드루스 목사의 항해와 더불어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는 다른 대륙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6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달된 교훈과 권면의 기별들이 나타난 시기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1859년부터 제 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는 체계적인 헌금에 관한 청지기 직분을 인식하게 되면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감당하는 일에 있어 발전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십일조, 즉 수입의 십 분의 일에 대한 온전한 의무를 인식하지 못했다. 제3권의 가운데 나오는 두 기사에서 주님의 사자가 "수입의" "십 분의 일"과 나머지 "십 분의 구"에 대해 기록하면서 십일조 의무를 계산하는 기초가 분명해졌다. 187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체계적인 헌금에 대한 이런 폭넓은 개념이 교단 정책의 일부가 되었는데, 성장하는 사업을 위해 지속적이고 대대적으로 필요한 수입을 확보하는 데 큰 기여를 한 그러한 조처는 1875년 초에 출판된 "십일조와 헌금", "체계적인 헌금"이라는 두 잘의 권면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 헌금에 대한 호소는 단지 돈을 거둬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헌금하는 사람의 품성을 계발하고 온전케 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임을 보게 되면서 진정한 청지기 직분에 관한 온전한 개념이 인식되었다. 예상대로 적극적인 전도 계획으로 인해 다른 종교 집단들과 마찰을 빚었는데, 그들은 자주 우리에게 논쟁과 토론을 걸었다. 10년 전, 우리 교회 목사인 모제스 헐(Moses Hull)이 그러한 토론을 벌이다가 원수의 편에 서면서 길을 잃고 말았다. 반복되는 권면을 통해서 그런 논쟁을 벌이는 노력이 위험하며 결실을 많이 거두지 못한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제3권에는 그러한 권면이 많이 있다. 본서에서는 부유한 농부와 교육받지 못한 그의 아내에게 보내는 권면으로 목사와 행정자들을 위한 지시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화제가 등장한다. 본서의  대부분은 대중들을 향한 기사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도처에서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 출판한 특정 개인에게 보낸 기별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엘렌 G. 화잇이 기록한 것처럼 상당수의 기별들이 "많은 면에서 다른 사람들의 사례의 표본이 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7   탁월한 몇 번의 계시가 본서에서 상당 부분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이 기간에 두드러진 계시가 자주 있지는 않았지만 좀 더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1871년 12월 10일과 1875년 1월 3일에서 나타났다. 후자의 계시는 제임스 화잇이 영문 570쪽에 기록된 각주의 설명해 놓았다. 전자의 계시를 받은 상황을 여기에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자 한다. 이 계시를 받은 곳은 버몬트 주의 보르도 빌(Bordoville)이었다. 12월 9일과 10일 그곳에서 ㅓ열린 집회에 관한 보고는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한 A. C. 부르도 우(Bourdeau) 목사가 리뷰 출판소로 보냈다. 여기서 화잇 부인이 "특별히 그 교회를 위해" 수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날 저녁 집회 때에 "특별한 증언들이 참석한 개인들에게 주어졌다. [권면을 받은 이들이] 그것들을 시인할 때 빛과 자유가 임했다." 일요일 오후에 어느 신자의 두 아들과 한 며느리가 화잇 부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 왔다. 그들은 "낙심한 상태"였다. 부르도 우 목사는 이때 벌어진 일을 이렇게 생생하게 제시했다. "이때 화잇 자매는 그들의 문제에 대해서 진정한 부담을 느껴 그들이 구원받기를 갈망하면서 그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이윽고 그녀는 그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그들 이주님께로 돌아오도록 그들을 위해서 큰 열성과 믿음과 끈기로 기도드렸다. 그들은 굴복하고 기도 중애 주님을 서기기로 약속했다. 주님의 영께서 점점 가까이 임하셨다. 화잇 자매는 자유로워졌으며, 곧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때에 계시 가운데 들어갔다. 그녀는 이러한 상태로 15분간 있었다. "그 소식이 퍼져 나가자 순식간에 그 집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죄인들은 떨었으며, 신자들은 울었고, 낙심했던 이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이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 일이 참석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자기 집에 있었던 이들도 큰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자기 성찰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천사가 그곳을 흔들고 있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 다가오는 심판과 환난기에 대한 공포와 임박성, 교회의 세속적인 상태, 자신들에게 형제 사랑이 부족하다는 점,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상태라는 깨달음 등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ㅡ 리뷰 앤드 헤랄드, 1871년 12월 26일. 이런 배경 가운데 교회 증언 3권이 기록되었다.

                                                                    엘렌 G. 화잇 유산관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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