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증언 3 권 // 교회증언 24호 (1875) 십일조와 헌금(2)
교회증언 24호 (1875) 십일조와 헌금(2)
슬로베니아에서
십일조와 헌금(2)
391 그분은 하늘에 진리를 기록하여, 그것이 살아 있는 글자로서 그분의 요구를 세상에 선포하게 할 수도 있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금이나 은에 의존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 50:10, 12)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사업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우리의 봉사가 필요한 곳은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길을 의도적으로 준비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의 동역자로 삼으심으로써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다. 그분은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자선의 활동을 하게 하시고자 사람들 사이에 협력이 필요하도록 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현명한 섭리로써 가난한 자들을 언제나 우리 곁에 두셨으며, 우리가 세상의 여러 가지 형태의 궁핍과 고난을 목격할 때 우리는 시험을 받고 입증을 받으며, 그리스도인 품성을 계발할 수 있는 입증을 받으며, 그리스도인 품성을 계발할 수 있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그분은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인 동정과 사랑을 발휘하게 하고자 가난한 자들을 우리 가운데 두신다. 지식이 부족하여 멸망해 가는 죄인들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진리의 빛을 전해 주지 않는 한 무지와 흑암 가운데 남아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도록 맡겨 주신 일을 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천사들을 보내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할 일을 주셨는데, 그 행심적인 이유는 그분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진정한 성격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당신의 대표자로 우리 중에 두신다. 그분은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마 25:42)다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고통을 당하는 인간, 고난 중에 있는 인간 자녀의 입장에서 그들과 동일시하신다. 그분은 그들의 필요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시며, 그들의 불행을 당신의 품에 안으신다.
392 황폐한 세상의 도덕적 흑암은 그리스도인 남녀들에게, 무한한 부를 소유하셨으나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분의 형상을 닮기 위하여 그들의 재물과 영향력을 드리는 일에 개인적 노력을 기울이라고 호소한다. 성령께서는, 그분의 진리를 기별을 보내셨으나 강권함을 받아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동역자의 의무를 느낄 수 있는 자들과 함께 거하실 수 없다, 감정은 변덕스러우므로, 단지 인간적 동정심에서가 아니라 보다 고상한 근거에서 주어야 할 의무를 사도는 강조한다. 그는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고 이기심 없이 수고를 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동료 인간들의 구원에 계속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할동적인 자선의 계획을 시작하라는 요구를 성경을 통하여 받고 있다. 도덕적 율법은 안식일 준수를 명하고 있지만, 계명을 그것을 범하는 경우나 그것을 범함으로써 받는 형벌에 의해 속박받는 경우 이외에는 짐이 아니었다. 십일조 제도 역시 그 계속에서 떠나지 않은 자들에게 짐이 되지 않았다. 히브리인들에게 명령한 이 제도는 그것을 창시하신 분에 의하여 폐지되거나 완화되지 않았다. 현재 효력을 진적으로 상실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은 그리스도인 시대에 있어서 그리스도만을 통한 구원이 더욱 충만한 빛으로 드러남에 따라 더욱 충실하게 수행되고 확대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율법사에게, 영생을 얻는 조건이 계명의 특별한 요구를 자신의 생애에서 실천하는 것이라고 알려 주셨는데, 그 계명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표상적 제사 제도가 폐지되었을 때에도 돌비에 새겨진 본래의 계명을 각 시대를 통하여 그것을 지키도록 요구하면서 변함없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시대에도 인간의 의무는 제한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세밀하게 정의되고 단순하게 표현되었다. 넓게 퍼져 나가는 진리는 그리스도의 사망 후에 싸움을 지속하기 위하여 더욱 큰 준비를 요구했고, 이 때문에 자선의 법은 히브리 국가 때보다 더욱 긴급하게 필요하였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 못지않게 더욱 큰 선물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원리는 선물과 헌물이 받은 빛과 축복에 비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분은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할 것이니라"(눅 12:48)고 말씀하셨다.
393 그리스도교 시대의 축복을 받은 처음 제자들은 구제와 자선을 통하여 반응을 나타냈다. 그리스도꼐서 당신의 제자들을 떠나 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내리심으로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자아 부정과 자아 희생의 사람이 되었다.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자선 사업에 대해 이방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충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고후 8:7). 여기에서 자선은 믿음과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근면과 어깨를 같이하고 있다. 스스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너그러움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청에 귀와 마음을 닫는 자들은 두려운 기만에 빠져 있다. 진리를 지극히 사랑하노라는 공언의 말을 떠벌리기 좋아하고, 진리가 전파되는 일에 흥미가 있다고 말로만 표현할 뿐 그 일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러한 자들의 믿음은 죽은 것이며, 행함으로 온전해지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영혼을 회심시키되 탐욕의 세력 아래 그대로 담겨 두는 그러한 실수는 결코 하지 않으신다. 십일조 제도의 근원은 모세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확실한 제도가 모세에게 주어지기 이전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종교적인 목적으로 하나님께 헌물을 바치는 것을 요구하셨으며, 그 근원은 멀리 아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그들은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와 축복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헌물로 나타내어야 했다. 이 일은 이어지는 세대를 통해서 계속되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아브라함에 의해 실천되었다. 동일한 원칙이 욥의 시대에도 존재했다. 돈 한 푼 없는 방랑자로 도망하는 중이었던 야곱이 한밤중에 벧엘에서 돌을 베개하고 쓸쓸하게 혼자 누워 있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 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 28:22)라고 주님께 약속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비치도록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들이 드리는 모든 것은 자원해서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그분은 당신의 창고가 마지못해 드린 헌물로 채워지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394 주님께서는 사람이 이기심을 단절시키고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강화시키는 행동을 하도록 의무를 지워 주심으로써 그를 당신 자신과 동료 인간에 대한 동정과 사랑에 밀접하게 연관되게끔 계획하셨다. 자선의 체계적 계획은, 이기심으로 기울어지며 관대한 행동에 대해 마음을 닫기 쉬운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마련되었다. 주님은 헌금이 정기적인 것이 되기를 바라시며, 드리는 것이 습관이 되고 자선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로 느껴지도록 계획하셨다. 하나의 헌물을 통하여 열린 마음이 이기적으로 냉랭해지고 닫히기 전에 또 다른 헌물이 드려져야 한다. 그 흐름은 계속적이어야 하며, 자선의 행동에 의하여 그 통로는 계속 열려 있어야 한다. 요구된 분량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는 이득의 십 분의 일을 정하셨다. 이 제도는 인간의 양심과 자선에 맡겨져 있으며 이 십일조 제도에 대해 인간의 판단은 자유로워야 한다. 이 제도는 자유롭게 양심에 맡겨져 있는 한편, 한 계획이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제시되었다. 전혀 강요가 요구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모세 시대에 모든 이득의 십 분의 일을 바치도록 요구하셨다. 그분은 이생의 사물과 달란트를 증가시켜 그분께 돌리도록 사람들에게 맡기셨다. 그분은 십 분의 일을 요구하시되, 이것을 인간이 그분께 돌려드릴 최소한의 것으로 요구하신다. 그분은 내가 내 것인 십 분의 일을 요구하는 한편, 너희에게 십 분의 구를 준다고 말씀하신다. 인간이 십 분의 일을 드리지 않을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게 된다. 속죄 제물, 화목 제물, 감사 제물 등이 이득의 십 분의 일 외에 추가로 요청되었다. 하나님께서 요청하시는 이득의 십일금을 드리지 않는 모든 행우는 하늘의 책에 그 행위자가 도둑질한 것으로 기록된다. 그러한 자들은 그들의 창조주의 것을 사취하게 된다. 이러한 태만의 죄가 저들 앞에 제시될 때, 그들이 행로를 바꾸고 그때부터 올바른 원칙을 따라 행하는 것만으로는 넉넉하지 않다. 이것은 채주에게 돌려지도록 그들에게 위탁된 재산을 유용한 하늘 기록의 숫자를 바로잡을 수 없다. 하나님과의 불충실한 거래와 배은망덕의 죄를 회개할 필요가 있다.
395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 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덕질 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8~10). 모든 십일조를 창고에 들이면,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부어질 것이라는 약속이 여기에 주어져 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 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3:11, 12). 만일 진리를 믿노라고 공언하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십일조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응한다면, 창고에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큰 사업을 진행시킬 재물이 풍성하게 공급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인간 자신의 일을 위하여 엿새를 주시고 제 칠일은 당신 자신을 위하여 따로 떼어 두신 것처럼, 사람들에게 십 분의 구를 주시고 십 분의 일은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요구하신다. 인식 일과 마찬가지로 수입의 십 분의 일 역시 거룩하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자신을 위하여 따로 떼어 놓으셨다. 그분은 인간에게 맡기신 재물의 수입을 통해서 땅 위의 그분의 사업을 추진시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옛날 당신의 백성에게 매년 세 번씩 회집 하도록 요구하셨다.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 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신 16:16, 17). 그들의 수입의 삼분의 일 이상이 거룩한 종교적 목적에 바쳐졌다.
396 역사상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체계적인 자선과 헌물과 연보 제도를 실천할 때마다 그들은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것과 비례하여 그들의 모든 활동에 번영이 따를 것이라는 불변의 약속을 깨달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요구를 인정하고 ㄱ분의 요청에 응함으로 그들의 물질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할 때에 그들의 창고는 풍성하게 채워졌다. 그러나 그들이 십일조와 헌물에 있어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할 때, 그들은 하나님뿐 아니라 자신들의 것도 도둑질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을 제한한 것에 비례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실 축복을 제한하셨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 재도가 히브리인들을 얽어맨 엄한 율법 중 하나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했던 자원하는 심령의 사람들에게는 짐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영원한 관심사를 잃어버리고 그들이 땅 위에서 가진 보화를 영혼들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은 하나님께 드리지 않음으로 저들의 이기적 본성을 강화했을 때뿐이었다. 이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는 고대의 이스라엘에게 보다 더 긴급한 요구가 주어져 있다. 매우 짧은 시간에 성취되어야 할 크고 중요한 사업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십일금 제도가 당신의 백성에게서 결코 소홀이 여김을 받도록 계획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마지막 사업을 위해 희생적인 확대되고 깊어지도록 계획하셨다. 체계적인 자선은 조직적인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헌물은 자원하는 헌물이다. 참된 그리스도인 자선은 감사하는 사랑의 원칙에서 흘러나온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그분이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사람들에 대해 나타내는 사랑이 없이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모든 정서를 지배하고 모든 정력을 지도하는 전인적인 지배 원칙이 되어야 한다. 구속의 사랑은 인간의 마음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부드러운 애정과 자아 희생적인 헌신을 일깨워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이기심을 깨뜨리고 잠자는 동정심을 깨우쳐서 귀중한 진리의 사업을 위하여 자신의 헌물을 드리게 하고자 마음을 감동시키는 호소가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397 예수께서는 무한한 희생으로 우리를 사셨다. 우리의 모든 능력과 영향력은 진정으로 우리 주님의 것이며 그분을 섬기는 데 바쳐져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죄의 속박에서 속량 받은 감사의 마음을 나타내게 된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위하여 일하신다. 그분은 하늘로 승천하셔서 당신의 피로 산 사람들을 위하여 탄원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상처 난 손을 드시고, 당신의 교회가 시험에 빠지지 않고 보존되도록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중보 하신다. 만일 우리의 지각력이 일깨워져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우리 주님의 놀라운 사업에 동참할 수 있다면 깊고 열렬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불태울 것이다. 우리의 무정함과 냉랭한 무관심이 우리를 경고하게 될 것이다, 감사로 충만한, 사랑으로부터 우러난 온전한 헌신과 자선은 지극히 작은 헌물, 자원하는 희생에 거룩한 향기를 더하여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중한 예물이 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구속주께 드렸을지라도,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매우 가치 있는 것일지라도,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매우 가치 있는 것일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진 감사의 빛을 사실 그대로 볼 수 있다면 우리가 드린 모든 것은 우리에게 매우 불충분하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천사들은 우리에게 보잘것없이 보이는 이 예물을 취하여 향기로운 예물로 보좌 앞에 드리게 되며 그것은 가납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우리의 진정한 위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고용된 종으로서 우리의 책임에 대해 올바른 견해를 갖고 있지 못하다. 그분은 당신의 고난의 생애와 흘리신 보혈로써 우리에게 삯을 미리 지불하심으로 당신 자신을 섬기도록 우리를 붙들어 매셨다. 우리가 가진 모든 좋은 것은 우리 구주로부터 빌린 것이다. 그분은 우리를 ㅊ어지기로 삼으셨다. 믿음과 사랑으로 드린 우리의 가장 작은 헌물과 가장 비천한 봉사는 영혼을 구원하여 주님을 섬기고 그분의 영광을 증진시키기 위한 헌신의 예물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한 관심과 번영은 모든 관심사를 능가하여야 한다. 쾌락과 이기적 관심을 생애의 주된 목적으로 삼는 자들은 충성스러운 청지기가 아니다.
398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기 위하여 자아를 부인하고, 자신과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봉사 사업에 드리는 자들은 이기적인 사람들이 찾지 못하는 행복을 발견한다. 우리 구주께서는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벌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고 말씀하신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고전 13:5)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생애를 특징지은 무아적 사랑과 자선의 열매이다.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율법은 우리 자신의 관심을 고상하고 영원한 관심사에 굴복시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고 명령하신다. 이것이 우리의 첫째 되고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에게 지상에 보화를 쌓아 두지 말라고 명백하게 경고하셨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의 마음이 하늘의 사물보다 땅 위의 사물에 머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이야말로 가련한 영혼들이 믿음의 파선을 맛본 곳이다. 그들은 우리 주님의 명백한 명령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길을 따랐으며, 돈에 대한 사랑이 그들의 생애에서 지배적 정열이 되도록 허용했다. 그들은 재물을 얻는 노력에 있어서 절제하지 않는다. 그들은 알코올 중독자가 술에 중독되듯 이 부를 향한 그들의 비정상적인 욕망에 중독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과, 그들 자신과 그들의 시간과 그들의 모든 소유가 그분께 속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많은 사람들은 사탄이 사탄이 그들의 돈을 금전상으로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곳에 투자하도록 제시하는 기만적 유혹에 미혹당하며, 대다수가 거기에 정복된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유의하여 그분의 사업의 필요를 채우는 것을 마지막 일로 삼는다. 그들의 재물에 비례하여 하나님의 사업에 투자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돈을 부동산에 붙들어 매어 놓았으므로, 하나님의 사업에 투자하여 실제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이 사실을 그들의 구속주의 사업에 거의 바치지 못하는 데 대한 변명거리를 삼는다. 그들은 비유에 나온 사람처럼 그들의 돈을 효과적으로 땅에 묻어 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으로 요구하시는 십 분의 일을 도둑질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늘 보화에 속한 자신의 것들을 도둑질한다.
399 체계적인 자선의 계획은 어느 한 사람도 무겁게 압박하지 않는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1, 2). 가난한 자들도 주는 특권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부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이 사업에서 한몫을 감당할 수 있다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주신 교훈은, 가난한 자들의 가장 적은 예물이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드려진 기꺼운 예물이면 부자의 가장 많은 현금과 마찬가지로 받으시는 바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드려진 가난한 자들의 예물은, 성소의 저울에서 드려진 양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희생을 유발한 사랑에 의하여 계량될 것이다. 예수님의 약속은, 풍부한 데서 드리는 부자에 의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릴 것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하나 그 적은 것을 기꺼이 드리는 가난한 사람에 의해서도 분명히 실현될 것이다. 가난한 자는 그가 가진 적은 것을 희생하되 그 희생을 진정으로 느끼게 된다. 부한 자는 풍부한 중에서 드리므로 부족도 느끼지 않고 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가난한 자는 자신의 안락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희생한다. 하나님의 섭리로, 인간의 유익을 모든 체계적 자신의 계획이 마련되었다. 그분의 섭리는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종들이 공개된 그분의 섭리를 따를 것 같으면 모든 사람들이 활동적인 일꾼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창고에 들이기를 거절하고 자녀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는 자들은 자녀의 영적 복지를 위태롭게 한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거치는 장애물이 되는 재물을 자녀의 앞길에 놓는다. 자녀는 그것에 걸려 넘어져 멸망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생의 사물에 대해 큰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게 빌려 준 재물을 올바로 사용함으로써 받을 수 있는 선한 것들을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니 않고 절약함으로써 이기적이요 탐욕스러운 자가 된다. 그들은 그들은 자신이 사용하지도 못할 부를 쌓아 두기 위하여 그들의 영적 복리를 등한히 하므로 신앙적 성장이 위축된다. 그들이 자녀에게 유산을 남겨 주는데, 십중팔구 그 재물은 그들에게 저주가 되었던 것보다 상속을 받는 자들에게 더 큰 저주가 된다.
400 부모의 재물에 의존하는 자녀는 흔히 이생에서의 성곡을 이루지 못하며, 일반적으로 내세에서의 생명을 확보하는 일에도 완전히 실패한다. 부모들이 저들의 자녀에게 남겨 줄 수 있는 최선의 유산은 유용한 노동에 대한 지식과 사심 없는 자선으로 특징지어진 생애의 모본이다. 그러한 생애를 통하여 그들은 돈의 참 가치를 깨닫게 된다. 돈은 오로지 자신의 부족과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고 하나님의 사업을 추진시킴으로 성취되는 선을 이룰 때에만 올바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소유에 따라서 기꺼이 바치되, 그들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더 이상은 요구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수입은 가족의 필요를 채우고 나면 여유가 없다. 그러나 이런 부류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다음과 같이 자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과연 내가 가질 수 있었던 것에 따라 드리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육체와 정신의 능력이 사용되도록 계획하셨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능력을 최대한으로 증진시키지 않았다. 노동은 사람에게 지정된 것이다.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필요하게 되었으므로 저주와 연결되었다. 인간의 지덕체의 복리에는 유용한 노동의 생애가 필요하게 되었다. 영감 받은 사도 바울은 "게으르지 말라"라고 권면한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간에 게으른 생애로써는 아무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 가난한 많은 사람들이 가진 모든 자본은 시간과 육체적 힘인데 흔히 안일을 사랑하고 부주의하고 게으름으로 인해 그것이 낭비되었으므로, 십일조와 헌물로 주님께 드릴 것이 없게 된다. 그리스도인 남성들이 최대한 효율적으로 노동할 지혜가 모자라고 그들의 심신의 능력을 현명하게 이용할 지혜가 결핍되어 있다면, 그들의 형제들의 판단과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온유와 겸손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의 더욱 훌륭한 판단을 통해서 저들 스스로의 결핍을 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동료 인간들의 유익과 하나님의 사업의 발전을 위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만족하고 있는 많은 가난한 자들은 그들이 할 마음만 있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부한 자들이 그들의 자본인 재물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들의 자본이 되는 육체적 힘에 대해 책임이 있다.
401 하나님의 창고에 재물을 드리는 사람들이 거기에서는 받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현재는 가난하지만 시간을 현명하게 사용하고 특허권에 대한 생각을 버리는 꾸준하고 힘든 노동보다 더 편안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고자 골몰하는 그들의 성향을 억제함으로써 현재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가난한 자들이 있다. 성공적인 생애를 못한 자들이 기꺼이 지도를 받는다면 그들은 자아 부정과 엄격한 절약으로 자신을 훈련시키고, 자선의 혜택을 받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나누어주는 자의 만족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게으른 종들이 많다. 만일, 그들이 그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에 큰 축복을 경험함으로써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는 말을 진정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올바로 발휘된 자선은 사람의 정신적 · 도덕적 힘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사업을 발전시키고 궁핍한 자를 축복하는 일에 가장 건전한 활동을 하게 한다. 재물을 가진 자들이 그들이 사용하는 푼돈에 대해서까지도 하나님께 책임이 있음을 깨닫는다면 그들이 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훨씬 많이 줄어들 것이다. 만일 양심이 깨우쳐진다면, 그 양심은 식욕, 교만, 허영, 쾌락에 대한 사랑 등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쓸데없이 사용한 돈에 대해 증가할 것이며, 하나님의 사업에 사용되었어야 할 주님의 돈을 낭비할 사실을 보고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재물을 낭비하는 자들은 머지않아 주님 앞에서 그들의 행동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임을 공언하는 자들이 몸을 치장하고, 집을 꾸미고, 허세를 부리고, 식탁 위에 건강을 해치는 호화로운 음식을 차리는 데 돈을 덜 사용한 다면 하나님의 창고에 많은 돈을 드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하늘과 부와 영광을 버리시고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어 우리로 영원한 부를 소유하게 하신 우리의 구속주를 닮게 된다. 우리가 너무 가난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십일조와 헌물을 하나님께 성실하게 드릴 수 없다면, 우리는 분명히 너무 가난하여 값비싼 옷을 입고 사치스러운 음식을 먹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를 즐겁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해로운 방종에 주님의 돈을 낭비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부요한가?라고 성실하게 자문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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