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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가정/엘렌지 화잇의 자서전

엘렌 G. 화잇의 자서전 / 51장 아본데일 학교(2)

by 동심초(남양주) 2024. 3. 27.

  엘렌 G. 화잇의 자서전 / 51장 아본데일 학교(2)  

 

 

  51장 아본데일 학교(2)  

 365  이 건물 건축이 삼분의 이 가량 진척되었을 때, 재무는, 자금이 바닥났으므로 작업을 천천히 진행시켜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개강 날짜가 박두하자, 학교 사업관계자들은 공부하러 올 학생들을 적절히 돌볼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참으로 불행할 것이라고 느꼈다. 화잇 여사는 학교 운영회를 둘러싸고 있는 어려움에 대하여 듣고 "학교는 광고된 날짜에 열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 말에 대해 건축자들은 "불가능합니다. 도저히 기일 내에 완공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일을 해결할 방도는 한 가지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을 성취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연합하고 사심 없이 협동하여 최고의 노력을 경주하는 일이다. 화잇 여사는 사람들에게 직접 호소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뒤이은 몇 주 동안의 경험을 나중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는 일요일 아침 여섯 시에 집회를 열기로 정하고 교우들도 함께 소집하였다. 우리는 형제자매들 앞에 현 상태를 내보이고 노력(勞力) 봉사를 요청하였다. 30명의 남녀가 일하기로 자신을 드렸으며, 비록 시간을 내기 어려웠지만, 그 건물이 완성되고 깨끗이 청소되고 가구를 비치하여 개교일로 예정한 그날에 사용할 준비를 마칠 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작업을 계속하였다. "1897년 4월 28일, 예정된 날짜에 S. N. 해스켈 목사 부부와 H. C. 레이시 교수 부부를 교사로 모시고 학교를 개강하였다. 첫날에는 등록생이 단 열 명뿐이었으나 학교가 실제로 열려 공부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널리 퍼지자 다른 사람들이 왔다. 한 달 후, C. B. 휴즈 교수 부부가 교사진에 합류했을 때는 거의 30명의 학생이 참석하였다.

 

 366  학기가 계속되면서, 거기서 가르치는 교훈의 특성이 교회에 소개되자 다른 사람들도 함께 공부하고자 많은 애를 썼다. 그 결과, 학기가 끝나기 전에 모두 60명이 등록하였고, 그중에 약 40명이 학교 기숙사에 거주하였다.

  또 다른 믿음의 시련  

학기가 계속되고 자녀들의 편의를 위해 가족들이 이사해 오면서 식당 위에 마련된 10석 정도의 임시 예배당으로는 안식일학교 학생들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 몇 년 동안에 안식일 집회는 먼저 힐리호텔의 식당에서 열렸었고, 그 후에는 어두컴컴하고 불편한 제재소의 지붕 밑 방에서 드렸다. 이 작은 예배당은 제재소 다락보다 훨씬 좋은 집회 장소이나 이제 그것도 너무 좁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지 많이 논의한 끝에, 형제들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분히 채우고도 남는 크고 산뜻하고 널찍한 교회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1898년 6월에 열린 기도 주일 동안 화잇 여사는 이 경험을 이렇게 말하였다. "이 집회소를 건립할 때가 왔을 때, 믿음과 충성에 대한 또 다른 시험이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의논하기 위해 회의를 하였다. 그 길은 난관으로 에워싸인 듯하였다. 어떤 사람은 '작은 건물을 둘러막아 만들고, 자금이 더 확보되면 확장하도록 합시다.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원하는 그런 집을 완공하기가 불가능합니다'라고 말하였다. 다른 사람은 '넓은 집을 세울 수 있는 돈을 얻을 때까지 기다립시다'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밤중에, '일어나서 지체하지 말고 교회를 세우라'라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다.

 

 367  그래서, 우리는 그 일을 직영(直營)으로 하기로 하고 믿음으로 전진하여 착공하기로 결정하였다. 바로 그 이튿날 밤, 집회소를 건립하는 일을 돕기 위해 … 남아프리카에서 200파운드의 환어음을 보내왔다. 우리의 믿음이 시험을 받았었고, 우리가 그 사업을 착공하기로 결정하자 주님께서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이처럼 큰 선물을 우리 손에 쥐어 주셨다. 이러한 격려를 받고 그 사업은 열렬하게 시작되었다. 학교 운영회가 대지와 100파운드를, 연합회가 200 파운드를 주었고, 교회 신자들이 그들이 바칠 수 있는 모든 것을 바쳤다. 교회 밖에서 후원자들이 도왔고, 건축자들은 돈이나 다름없는 귀중한 시간의 일부를 드렸다. 그렇게 하여, 공사가 끝나고, 우리는 사백 명이 앉을 수 있는 아름 다운 건물을 갖게 되었다."* 그동안 학교는 번창하고 상당히 많은 청년 남녀들을 가르쳐서 예수님의 봉사 사업에 나아갈 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1898년 10월 14~24일까지 브리스베인에서 열린 퀸즈랜드 장막 부흥회에서 화잇 여사는 학교발전에 있어서 가장 고무적이었던 면들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첫해 동안,… 약 60명의 출석생 중 약 30명가량이 16세 이상이었다. 이 중에서 방학 동안에 우리 교회 사업 분야에서 일하도록 열 명이 채용되었다. 이듬해에는 100명이 첨석 했는데, 50명이 16세 이상이었고, 그중에서 32명이 방학 동안에 일할 수 있는 확실한 일자리를 찾았다. 그 둘 중 25명은 합회들이나 종교 사업 단체에 고용되었다."*

  목표와 목적  

 368  아본데일 학교 경영자들이 여러 해 동안 내내 계획해 온 것은, 학생들을 그리스도인 사업의 많은 분야에서 봉사하기에 실제적으로 적합하게 만들려는 목적을 위해서였다. 화잇 여사는 거듭거듭 학교가 당면한 사업, 그리고 실생활의 문제와 매일 접함으로써 학생과 교사들이 얻을 수 있는 큰 유익에 대해 분명하고 힘 있게 강조하였다. 1898년 9월에 화잇 여사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습득한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기를 기꺼워하고 또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이곳에서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학생들을 다방면으로 교육시킬 수 있는 많은 교사와 더 많은 인재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고아가 된 소년과 소녀는 이곳에서 거처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병원을 위한 건물이 세워져야 하고,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바가 마련되어야 한다. 유능한 농장 관리인을 고용해야 하고, 또한 학생들에게 일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일에 그들의 재능을 전적으로 사용할 현명하고도 원기 왕성한 사람을 여러 생산 기관의 책임자로 고용해야 한다. 산업 분야에서 훈련을 받기 원하는 많은 청년들이 이 학교에 올 것이다. 산업에 관한 교과는 회계와 목수일과 농장 경영에 포함되는 모든 것을 포괄해야만 한다. 또한 대장장이 일, 칠하기, 제화, 요리, 세탁, 수선, 타자, 인쇄 등을 가르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369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이렇게 훈련하는 일에 쏟아부어 학생들이 나아가 실생활의 의무에 적합하게 되어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

  선교 활동은 최고의 훈련  

"여호와께서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을 분명히 축복하실 것이다. 학교는 교사와 학생들이 그들의 재능을 성실하게 사용하여 계속적인 능력을 얻을 수 있도록 경영되어야 한다. 그들이 배운 것을 실제 활용함으로 그 지혜와 지식이 계속 증가할 것이다. 우리는 책 중의 책으로부터 우리가 생활하고 활동하는 원칙들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능력을, 그것에 대해 우선권을 갖고 계신 그분께 바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전념할 가치가 있는 모든 분야에서 귀중한 발견을 이룰 것이다. 우리 학교는 하나님의 감독 아래 운영되어야 한다. 청년 남녀들을 위해 해야 할 아직 이루지 못한 사업이 있다. 우리의 훈련 학교의 혜택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청년들이 매우 많다. 그들에게는 활동적이고 정력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노작 훈련 과정이 필요하다. 모든 종류의 노동은 우리 학교와 연관되어야 한다. 학생들은 현명하고 영민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도자 밑에서 배워야 한다. 각 분야의 일은 오랜 경험과 지혜를 통해 우리가 계획하고 실행하게 될 수 있도록 가장 철저하고도 체계적인 방법으로 지도되어야 한다.

 

 370  교사들은 이 문제의 중요성에 눈을 뜨고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농업과 다른 분야의 노동을 가르치라. 모든 분야의 작업에서 최상의 결과를 추구하라. 하나님의 말씀의 과학을 노작에 활용하여, 학생들이 올바른 원칙들을 이해하고 가능한 최고의 표준에 도달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주신 재능을 발휘하고, 그대의 모든 정력을 주님의 농장을 발전시키는 데 사용하라. 씨 뿌린 데서 가장 큰 보상과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 일꾼으로 훈련받기 위해 모여들 수많은 학생들에게 육신적 양식과 영적 양식 모두를 충분히 공급해 줄 수 있도록 연구하고 일하라."*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들  

남양주의 이민 집단들과 대서양 군도에 있는 교역자들이 새로운 지역으로 계속 진출하자. 그들은 추수할 일꾼들을 훈련하는 일에 가능한 모든 노력을 쏟아부어야만 한다는 깊은 확신을 갖게 되었다. 1898년 새로 조직된 퀸즈랜드 합회가 주최한 은혜로운 장막 부흥회에 참석하였던 어느 날, 화잇 여사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우리 주위에는 희어져 추수하게 된 들판이 있다. 우리 모두는 이 들판에 들어가 각 도시와 촌락에서 진리의 깃발을 높이려는 강한 소망을 느끼고 있다. 우리가 사업의 막대함과 지체하지 말고 추수장에 들어가야 하는 긴박감을 깨달을 때, 현재 단지 두세 명밖에 없는 일터에서 수백 명의 일꾼들이 필요하며,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일꾼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기관들을 설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371  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빛에 따라 남양주 연합회 의원회가 새로운 지역에 들어가는 그들의 의무를 새로이 연구하면서, "학교와 병원과 식품 공장은 동료들의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국내외로 나아가는 선교사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일에 함께 연합하는 세 기관임을 깨달았다." 화잇 여사는 호주에 있는 형제들의 이 같은 사전 조치에 관하여 리뷰지의 독자들에게 이렇게 보고하였다. "우리 모두는 이 사업이 매우 시급한 것임을 느꼈다. 기다릴 수 있는 분야는 하나도 없다. 우리 모두는 신속하게 전진해야 한다." 남양주에서 강력한 후원자들을 양성하고 청년들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훈련시킬 수 있는 종합 시설문을 설립하는데 주력했던 몇 해 동안, 때때로 화잇 여사와 동료들은 이 넓은 추수장에서 미래에 얻게 될 수확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이 분야의 개척자들인 해스켈, 콜리스, 이스라엘, 다니엘스 목사와 다른 사람들은 폴리네시아와 멜라네시아와 미크로네시아 주변 섬들에 들어갈 일꾼들을 양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90년 대 말, 현대 진리 사업의 여러 분야인 출판, 교육, 의료 사업이 잘 정착되고 많은 청년들이 일꾼으로 양성되고 있을 때, 남양주 연합회의 책임자들은 그들 주위에 있는 봉사의 기회를 더욱 분명하게 보게 되었다.

 

 372  1899년 초, 대총회에 모인 하나님의 사업의 지도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화잇 여사는 마침내 미래의 이러한 가능성의 대요를 말하였다. 화잇 여사는 남양주의 일꾼들을 위한 강력한 훈련 기관을 운영하는 것의 유용성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우리 형제들은 우리를 돕는 일이 곧 자신을 돕는 일임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곳의 사업을 시작하도록 주어진 도움은 다른 곳의 사업을 북돋우는 결과를 낼 것이다. 그대의 선물이 계속적으로 우리를 재정난에서 해방시켜 줄 때, 우리의 활동 범위는 넓어지게 될 것이다. 영혼을 수확하고, 교회를 세우고, 재정 능력 또한 증가될 것이다. 우리는 이곳의 사업을 수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을 위해 나누어 줄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하게 될 것이다. 지경 너머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진리의 승리를 확신시키면서 유리하게 일하는 것을 가능케 해 줄 수 있는 재원을 억제한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선교지를 위한 훈련장  

당시 남양주 연합회장이었던 A. G. 다니엘스 목사는, 지경 너머에서 선교 사업의 짐을 나누어지기 원하는 남양두의 형제자매들을 대신하여,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신속한 발전상과, 셋째 천사의 기별을 선교 지역에 전하는 데 있어서 그들 모두가 미국과 유럽의 동료 역군들과 연합할 수 있는 능력을 대한 강력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음을 1899년 대총회에 보고하였다. 그는 기록하기를, "남양주에서 일하는 우리는 주의 종 화잇 여사를 이곳에 머물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파악하는데 더뎠습니다.

 

 373  그가 이곳에 왔을 때, 우리 모두는 그저 단기간의 방문이려니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화잇 여사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더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화잇 여사를 이 나라에 머물게 하셨고, 구름기둥을 다른 곳으로 들어 옮기지 아니하셨습니다. 화잇 여사가 오신 이래, 하나님께서 계속 그에게 이곳의 사업에 대해 지시를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노동 방법을 잘못들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추수장 전체의 사업에 다른 틀이 놓이도록 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분야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도록 계속 '전진하라'라고 훈계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사업을 확장시키기 위해 언제나 우리를 지도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종에게 교육 사업에 관한 막중한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을 수행하느라 겪은 고투는 아주 극심하였습니다. 사단은 한치의 땅을 가지고도 다투어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승리를 많이 안겨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아본데일 학교를 세우셨으며, 이를 통하여 영광 받으실 것이라는 가장 분명한 증거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학교의 위치와 목적과 경영에 대한 세밀한 지시를 주셨습니다. 이제 그분께서는, 만일 우리가 그분이 주신 빛 가운데로 걸어간다면 아본데일을 많은 선교지를 위한 훈련장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이 모든 일에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 상황을 이해하도록 일깨워, 이사업을 지탱하기 위해 그들의 모든 노력을 기울이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담대하게 응답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재원은 우리가 하도록 요청받은 이 큰 사업에 비해서 너무나 적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업에 적합하도록 자신을 준비시키기 원하는 총명한 젊은 남녀들의 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시일 내에 영국 국기가 휘날리고 있는 선교지를 위한 많은 훌륭한 일꾼들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374  여호와께서 예언의 신을 통해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며, 그분께서 그것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해 개최될 남양주 연합회 총회가 개회되기 전인 1899년 7월 22일 안식일 오후에, 아본데일 학교와 그 사업에 관한 담화에서 화잇 여사는 그곳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사업의 선교적 특성을 상당히 길게 강조하였다. 화잇 여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이곳을 사업의 중심지요 실물 교훈의 장소로 계획하신다. 우리 학교는 미국에 세워진 어떤 학교나 이 나라에 세워진 다른 어떤 학교를 모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의의 태양을 바라보면서, 할 수 있는 한 모든 빛줄기를 잡으려 하고 있다. … 이 중심지로부터 우리는 선교사들을 파송해야 한다. 여기서 그들이 교육과 훈련을 받고 섬들과 다른 나라들로 파견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선교 사업을 위한 준비를 하기를 원하고 계신다. 이룩해야 할 장엄하고 위대한 사업이 있다. 이곳의 몇몇 사람들은 기별을 선포하기 위해 중국이나 다른 장소로 가야 하나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이들은 먼저 배움의 자세를 가지고 자신을 시험하고 시련을 받아야 한다."* 지경 너머에 있는 곤궁에 처한 선교지를 위하여 많은 그리스도인 일꾼들을 양성시킨다는 이 이상(理想)은, 아본데일 학교의 후원자들 앞에 계속 고수되었으며, 현재 '남양주 선교 대학'으로 불리고 있는 학교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뒤이은 여러 해 동안 그곳의 사업을 특징지었던 이상이었다. 화잇 여사는 1899년을 마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믿음으로 나아가서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375  이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고서 망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룩해야 할 일의 반도 채 마치지 못하였다. 아직도 우리는 유리한 고지에 있지 못하다. 우리 앞에는 큰 사업이 놓여 있다. 우리 주변 도처에 빛과 진리를 갈망하는 영혼들이 있다. 우리가 어떻게 그들에게 이를 수 있겠는가? … 호주에 있는 형제자매들이여, 각 도시와 교외에는 타락한 세상에 마지막 자비의 기별을 전하는 데 있어 해야 할 사업이 있다. 우리가 이 빈곤한 들판에서 일하려 하는 동안, 멀리 떨어진 나라로부터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부르짖음이 들려온다. 그곳들은 아마도 우리 시야에 들어오는 들판만큼 추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곳이 아니고 쉽게 도움의 손길을 뻗을 수 있는 곳도 아닐지 모르나 그곳들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가 십자가의 승리로 밀고 나가기를 원한다. 우리의 구호는 '전진, 영원한 전진!'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온 세상이 여호와의 영광으로 환하여질 때까지 '지경 너머'에 대한 짐을 결코 내려진, 영원한 진진!'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앉아서 생각하고 기도하고, 우리 주위의 각처에서 이 사업을 어떻게 착수해야 할지를 계획한다. 앞으로 이 사업을 진척시킬 충실한 선교사들은 어디에 있는가, 또 어떻게 그들을 부양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어떻게 선교사들을 훈련시킬 것인가? 문호가 열린 일터에 들어가도록 일꾼들을 어떻게 준비시킬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로 최대의 부담을 느낀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본데일에 있는 학교를 위해 특별히 염려한다. 우리는 다방면에서 일꾼들을 교육하기 위해 적절한 설비를 마련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올바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과 함께 동역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젊은이들을 본다. 우리는 그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 몇몇 사람은 학생들을 우리 학교에 입학시키고 그들의 경비를 써 가면서 그들을 도와, 그들을 주님의 포도원의 어느 한 분야에서 일하는 일꾼으로 만들고 있다.

 

 376  이 분야에서 더 많은 일이 이루어져야 하며, 선교사로 훈련받도록 섬나라들로부터 교역자들이 보낼 사람들을 위해서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미래에 우리 학교는 주님께서 지세히 이르신 대로 활동적인 선교 매체가 되어야 한다. … 우리는 국내외의 일터를 필요에 위해 부응하기 위해 현재보다 20배 이상의 많은 일꾼들을 확보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본데일 학교는 발생하리라던 일이 이루어졌음을 증언하였다. 그러므로, 아본데일 학교는 설비들을 갖추는데 제한받디 말아야 한다.

  여러 해가 지난 후  

C. W. 어윈 교수는 1901년~1909년까지 아본데일 학교 교장으로 일했으며, 1909년 대총회에 보낸 보고에서, 아본데일에서 발생하리라던 일이 이루어졌음을 증언하였다. 시간이 흘러 그 사업이 발전하는 것을 지켜볼 기회를 갖게 되었을 때, 우리는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장소를 선택하도록 인도하셨다고 매우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학교의 위치에 관해 말한 모든 것이 이곳에서 성취되었습니다. 모두 완전하게 말입니다."어윈 교수는 계속해서 말하였다. "화잇 여사의 권고로 인하여 형제들은 학교를 위한 그토록 광범위하고 대범한 계획을 세웠으며, 이 사업에 관여했던 지난 8년 동안 저는 단 하나의 계획도 바꾸어야 할 필요성을 아직껏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업을 그곳에 설립하는 일을 인도하셨고, 지난 8년 동안의 우리의 노력은 이미 수립된 계획을 보다 완전하게 발달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377   이 같은 결과로 미루어 보아, 하나님의 지시가 진실이었음이 입증되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후원자가 적고 백성들이 심한 재정적 곤란을 겪고 있는 곳에서 그런 유의 학교를 시작함으로 학교가 2만 3천 달러라는 큰 부채를 어쩔 수없이 안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실물교훈'의 판매 계획이 착수되었고, 이곳의 형제들은 이 사업에 관한 지시를 실행하려고 진지한 목적을 가지고 이 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학교를 위해 '실물교훈'을 판매한 대가로 현재까지 2만 달러가 넘는 자금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책 판매를 시작할 때 2만 3천 달러였던 부채는 '실물교훈'을 판매함으로 모두 갚게 되었습니다. … '실물교훈' 판매 운동을 시작할 때, 아본데일 학교의 시가(時價)는 2만 3천 달러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1909년)의 학교 시가는 약 6만 7천 달러입니다. 시가 2만 3천 달러에 학교가 받은 2만 달러를 더하면 4만 3천 달러가 됩니다. 그래서 현재 6만 7천 달러에서 이 금액을 제하면, 지난 8년 동안 학교는 2만 4천 달러의 이익을 얻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실업 학교를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증명해 줍니다. 8년 전 이 학교에서 우리의 일을 시작할 때, 학생들은 산업 노동으로 연간 약 2천 달러를 벌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연 2천 달러에 해당되는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업은 그날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성장하여, 1908년 9월 30일, 학생들은 작년 한 해 동안 그들의 학비로 2만 달러를 벌었다고 말하게 까지 되었습니다.*…

 

 378  '실물교훈' 사업을 시작한 이래, 우리는 일터로부터 한 푼의 돈도 기증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실업 학교는 다른 것뿐만 아니라 재정적인 면에서 성공리에 운영될 수 있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는 우리가 할 유일한 일은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이 사실임을 굳게 붙잡고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나는 재정적인 면만이 학교의 성공을 보여 주는 최상의 지표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 이 학교는 여러 지역으로 파송할 선교사들을 준비시키고 있어야 한다고들 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호주에는 수백만의 백성이 살고 있는 넓은 선교 지역이 많이 있습니다. … 이들은 무려 6천5백만에서 7천만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원주민들로서, 반드시 현대 진리를 맛보아야 합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아본데일 학교 출신 두세 명만이 이 선교 지역들에서 일했는데, 오늘날에는 거의 30명가량이 이 지역들에서 열성적인 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1913년 대총회에서 J. E. 펄튼 목사는 아본데일 학교에 관해 이렇게 보고하였다. "매년 이 기관은 일터를 위해 새 일꾼을 보내고 있습니다. 전에 이 학교의 학생이었던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국내와 국외의 선교지에서 성공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엘렌 G. 화잇의 자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