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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리/산상보훈

산상보훈 2장 // 팔복 ①

by 동심초(남양주) 2022. 2. 16.

 팔복 ① 

 백일홍 

 

 

 팔복 ① 

 6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마 5:2, 3).  방랑하는 무리들이 귀에는 이 말씀이 신기하고 새로운 것으로 들린다. 이런 교훈은 그들이 지금껏 제사장이나 랍비들에서 듣던 것과는 판이한 것이다. 그들은 이 교훈에서 자만심을 높여 주거나 야심을 길러 주는 것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새 선생에게는 그들을 완전히 사로잡는 능력이 있다. 거룩한 사랑의 향기가 꽃향기처럼 그분이 계신 바로 그곳에서 흘러나온다. 그분의 말씀이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시 72:6)같이 흘러나온다. 모든 사람은, 영혼의 비밀을 다 아시면서도 따뜻한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가까이 나아오시는 분이 계심을 직감한다. 그들의 마음이 그분을 향해 열리고 그들이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성령께서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필히 배워야 할 교훈의 의미를 얼마간 알려 주신다. 그리스도 당시에, 백성들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영적으로 보화를 가진 부자인 줄 알았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고 한 바리새인의 기도는 그가 속한 부류는 물론 크게는 국민 전체의 생각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 가운데는 자신들의 영적 빈곤을 느낀 자들도 더러 있었다.

 

 7  그리스도의 거룩한 능력이 엄청난 어획고를 올리는 이적을 통해 드러나자, 베드로는 구주의 발 앞에 엎드리며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하고 부르짖었다. 그러자 그 산 위에 모여 있던 무리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순결 앞에서 자신들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계 3:17) 깨달은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딛 2:11)를 갈구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사말은 이들 영혼들에게 소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들은 그들의 생애가 하나님의 축복 아래 있음을 알았다. 예수께서는 "부자라 부유하여"(계 3:17)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도 축복의 잔을 내미셨다. 그러나 그들은 조소로써 그 은혜의 선물을 외면하였다. 스스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 다시 말해 자신이 꽤 선량한 줄로 생각하고 현 상태에 만족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에 참예하려고 하지 않는다교만은 아무 필요를 느끼지 않으므로 그리스도와 또 그분께서 오셔서 주시고자 하신 무한한 축복에 대하여 마음의 문을 닫는다. 이러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위한 자리가 없다. 스스로를 부요하다고 존경받을 만한 인물로 여기는 자들은 믿음으로 구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풍족하다고 생각하므로 빈손으로 돌아간다.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고 스스로 어떤 의로운 행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실 수 있는 도움을 감사히 여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며 그리스도께서 복이 있다고 하신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당신의 용서하시는 사람을 뉘우치게 만드신다.

 

 8    죄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을 받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지금껏 해온 모든 일이 이기심과 죄로 혼합되어 있는 것을 본다. 가련한 세리처럼, 그들은 멀리 선 채 눈을 들어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하고 부르짖는다. 그들은 복 있는 자들이다.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용서가 주어진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시기 때문이다. 다음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겔 36:26, 27). 예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하여 "천국이 저희 것이요"라고 말씀하신다. 이 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바라던 것과 같은 일시적인 지상 왕국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과 은혜와 의를 가진 영적 나라를 개방해 놓고 계셨다. 메시아의 주권을 나타내는 기(旗)가 두드러지게 구별되는 것은 인자의 특성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의 백성들은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하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천국이 저희 것이다. 비록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는 않았으나, 그들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골 1:12) 할 사업을 이미 그들 안에서 시작되고 있다. 자기 심령의 처참한 빈곤을 느끼는 사람,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게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의와 능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고 말씀하신다.

 

 9  그분은 그대의 궁핍을 당신의 은혜의 부요함과 바꾸라고 명령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받을 가치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보증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으신 것을 물론 당신에게로 나오는 모든 사람을 넉넉히 구원할 수도 있으시다. 과거의 경험이 어떠하든지, 그리고 현재의 환경이 아무리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연약하고 속절없고 낙담한 현 상태 그대로 예수께 나가면, 우리의 자비하신 구주께서는 멀리서부터 우리를 맞아 당신의 사랑과 팔과 의의 두루마기로 감싸 주신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품성을 그대로 나타내는 흰 두루마기를 입혀 아버지께 소개하신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간구하신다. 내가 대신 저 죄인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제 고집대로 하는 이 자녀를 보지 마시고 나를 보아주십시오. 사단이 죄를 들추며 우리의 영혼을 크게 대적하고 우리를 자기의 것으로 주장하는 데 반해, 그리스도의 보혈은 더욱 강력하게 호소한다. "어떤 자의 내게 대한 말에 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사 45:24, 25).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여기서 애통이라고 하는 말은 진정한 마음으로 죄를 슬퍼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사람이 십자가에 들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분별하게 된다. 그는 영광의 주님을 징벌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는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따뜻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배운 망덕과 반역으로 일과된 생애를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그는 가장 좋은 친구를 버리고 가장 귀중한 하늘의 선물을 모독해 온 것이다.

 

 10  계속해서, 그것도 직접,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상처를 받아 피가 흐르는 그분의 심장을 찔러온 것이다. 그는 넓고 어둡고 깊은 죄의 심연(深淵)에 의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어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느낀다. 이런 애통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죄를 드러내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피하여 그분을 통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자유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이다. 우리는 진정한 회개를 통해 십자가 아래로 나아가며 그곳에다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 구주의 말씀은 재난이나 사별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의 기별도 있다. 우리의 슬픔은 아무런 근거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다(렘 3:33). 그분께서 시련과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히 12:10)기 위함이다. 감당하기 심히 어렵고 가혹하게 보이는 시련이라도 일단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축복임이 판명될 것이다. 세상의 쾌락을 앗아가는 혹독한 재난이 오히려 우리의 눈을 하늘로 향하게 하는 수단이 될 것이다. 슬픔을 당하여 예수님 안에서 위로를 구하는 일이 없었더라면 결코 그분을 알지 못했을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인생의 고난을 우리 성품에서 불순물과 거친 것을 제거해 내는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이들에 의해 채석들이 깎이고, 끌로 새기어고, 갈리고 다듬어지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또, 회전 연마기(硏摩機)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간 돌은 하늘 성전의 제자리를 채우는데 부족함이 없게 준비되어 나온다. 쓸데없는 물건을 위해서는 주께서 그처럼 신중하고 철저한 작업을 하지 않으신다. 오직 그분의 보석만이 궁전의 각 양대로 다듬어진다.

 

 11  주께서는 당신을 의지하는 모든 삶을 위하여 일하실 것이다. 신실한 자는 귀중한 승리를 얻을 것이다. 가치 있는 교훈을 배우게 될 것이며, 고귀한 경험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슬픔을 당한 자들에게 결코 무심하지 않으신다. 다윗이 감람산에 올라가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며 행"(삼하 15:30)할 때, 주께서는 동정 어린 눈으로 그를 보고 계셨다. 다윗은 베옷을 입었으며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겉으로 나타난 그의 겸비(謙卑)는 그의 회개를 증거해 주었다. 그는 울먹이는 말로 자기의 사정을 하나님께 고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버리지 않으셨다. 다윗이 무한한 사랑이신 하나님께 가장 사랑스러워 보인 때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의 아들에게 선동되어 반역에 가담한 원수들을 피해 도망가면서 마음에 찔림을 받은 때였다. 주님께서는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통회하는 마음에 힘을 주시고 슬퍼하는 심령을 고결하게 하심으로 마침내 당신께서 거할 수 있게 만드신다. 그러자 우리 중에는 환난을 당할 때 야곱과 같이 할 자가 얼마나 될까? 우리는 그것을 원수의 손으로 생각하고 어둠 속에서 힘이 다할 때까지 무모하게 싸우지만, 아무런 위로나 구원을 발견하지 못한다. 새벽에 천사에게 일격을 맞은 야곱은 지금껏 싸우던 자가 언약한 천사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속절없이 울면서 그의 영혼이 갈망하던 축복을 받기 위하여 무한한 사랑을 가지신 분의  품에 안겼다. 우리도 시련이 유익이 됨을 배우며, 주님의 징계를 경시하지 말고, 하나님께 책망받을 때 낙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12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욥 5:17~19). 예수께서는 상처를 입은 모든 사람을 찾아 치료해 주신다. 사별과 고통과 고난의 생애도 그분의 황홀한 임재 앞에서는 환하게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 못 할 슬픔과 아프고 상한 마음으로 우리로 하여금 눈을 들어 당신의 자애스러운 모습을 바라보게 하신다. 거룩하신 구주께서는 눈물로 앞이 가려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곁에 서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손을 꽉 붙잡길 원하신다. 그리고 또, 우리가 단순한 믿음으로 당신을 바라보며 당신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했으면 하고 원하신다. 그분의 마음은 우리의 슬픔과 비애와 시련을 향하여 열려 있다. 그분은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자애로운 손길로 우리를 감싸 주신다. 우리는 마음을 그분께 바치고 온종일 그분의 자애를 명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할 때, 그분께서는 우리의 영혼이 매일 당하는 슬픔과 어려움에서 벗어나 평화 가운데서 살게 해 주실 것이다. 고통과 슬픔 중에 있는 자녀들이여, 이것을 생각하고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의 슬픔을 애달파하고 그 죄를 슬퍼하여 우는 자들 역시 복이 있다. 이 같은 애통에는 자신을 생각하는 일이 전혀 개재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슬픔을 아는 분이시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을 당하신 분이시다. 그분의 마음은 사람들의 죄악 때문에 찢기고 상하셨다. 그분은 인류의 궁핍과 불행을 해결하기 위하여 무아(武我)의 열성으로 일하셨다.

 

 13  그래서 생명을 얻기 위하여 당신께 나오기를 거절하는 무리들을 보실 때는 늘 애석함으로 마음이 무거우셨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다 이와 같이 경험을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 줄 때, 그들은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그분의 수고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장차 나타날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분과 함께 일하고 그분과 함께 슬픔의 잔을 마심으로 그분의 기쁨에도 참여하게 된다. 예수께서 위로의 봉사를 하신 것은 고난을 통해 서였다. 그분은 인류가 당하는 모든 고난을 같이 당하신다. "자기가 시험을 당하는 모든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사 63:9).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 모든 사람은 이 봉사 사업에 참여할 특권을 부여받고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5). 주께서는 애통하는 자에게 줄 특별힌 은혜를 가지고 계시며, 그 은혜의 능력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영혼을 구원하게 될 것이다. 그분의 사랑은 상하고 터진 마음에 통로를 열어 주며 슬퍼하는 자들에게 치유의 유향이 된다.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 4).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5). 팔복에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쌓아가는 길이 사방으로 나 있다. 그리스도의 필요를 깨닫고, 죄 때문에 애통하고, 그리스도와 고난의 학교에 함께 앉은 사람들은 거룩한 교사에게서 온유를 배우게 될 것이다.

 

 14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참고 온유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 귀하게 여기는 특성이 아니었다. 모세가 성령의 영감을 받아한 말, 다시 말해 그가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한 말은 그 당시 백성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연민이나 조소를 자아내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온유를 천국에 들어가는 첫째 조건으로 삼으신다. 그분의 생애와 품성 속에서 이 귀한 덕성의 거룩한 미(美)가 나타나 있다.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되"(빌 2:6, 7)기로 작정하셨다. 생애의 온갖 미천한 경험을 통하여, 그분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다니시되 왕으로서 충성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는 자가 되기로 하셨다. 그분의 태도에는 고집이나 냉혹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무것도 었었다. 세상의 구주께서는 천사보다 더욱 위대한 특성을 소유하셨으나, 그분의 신성한 존엄성에는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이끄는 온유를 겸손히 혼합되어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비우셨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하시는 일에는 어디에도 자아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분의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하셨다. 지상에서의 사명이 거의 끝날 무렵,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할 수 있으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그런 그분께서 이제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마 16:24), 자아를 물리치고 이것이 더 이상 영혼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15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극기와 그분의 겸비한 마음을 쳐다보는 사람은 다니엘이 인자와 같은 이를 바라보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단 10:8)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자랑으로 여기는 자립과 자존은 사단의 속박의 표로서, 참으로 비열한 것으로 나타난다. 사람의 본성을 보면 언제나 자기 과시를 위해 애쓰고 투쟁을 위해 준비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해 배운 사람은 이기심과 교만과 지배욕을 멀리 한다. 그리하여 심령 속에 안정이 깃든다. 자아가 심령의 지배 아래 굴복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제일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하여 전전긍긍하지 않게 된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밀어낼 생각도 품지 않게 된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발아래 앉는 것을 제일 높은 자리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인도하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인 채 그분의 손이 우리를 이끌어 주기를 기다린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경험을 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우리가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거하는 손님으로 영접할 때,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안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과 뜻을 지켜 줄 것이다. 자상에서의 구주의 생애는, 비록 투쟁의 와중에서 보낸 것이라도 평화의 생애였다. 분노한 원수들이 계속해서 따라다니는 중에도, 그분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고 말씀하셨다.

 

 원저자 : 엘렌 G. 화잇 

 발행처 : 시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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