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 ②
딸기꽃
큰꽃으이리
팔복 ②
16 어떤 인간적인 소동이나 사단의 분노도 이같이 하나님과 완전한 교통으로 얻어지는 안정은 깨뜨릴 수가 없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나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향상을 위한 봉사의 멍에를 메라. 그리하면 그 멍에가 쉽고 그 짐이 가벼움을 깨닫게 되리라. 우리의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자아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그것이 굴욕과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방어 태세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죽고 우리의 생애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하나님 안에 감추어질 때는 무시나 경멸을 조금도 괘념치 않게 될 것이다. 비난에 대하여 귀머거리가 되고, 조소와 모욕에 대하여는 소경이 될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한다(고전 13:4~8). 세속적인 근원에서 나온 행복은 그 행복을 이루어 주는 다양한 환경과 마찬 가지로 변하기 쉽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평안을 변하지 않는 영속적인 평안이다. 그것은 생애의 어떤 환경에 위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세상 재물의 양이나 세상 친구의 수에 위해 결정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는 생명수의 근원이시므로, 그분께로부터 얻은 행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가정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온유는 집안 식구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다툼을 방지해 주며, 화를 내며 대답하지 않게 해 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흥분을 진정시켜 주며, 그 매력을 감지할 수 있는 반경에 거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17 온유는 그것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세상의 가정들을 하늘에 있는 큰 가정의 한 부분이 되게 해 준다. 원수 진 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보다는 무고(誣告)를 견디는 쪽이 훨씬 낫다. 증오와 복수의 정신을 원래 사단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정신을 품는 자에게는 불행이 초래될 뿐이다. 마음의 겸비, 곧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얻는 온유는 진정한 축복의 비결이다.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 149:4).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우리의 첫 조상이 아름다운 이 지상 곧 그들의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권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자아를 높이고자 한 욕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것을 속량 하는 것은 자기희생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그러신 것처럼 우리도 승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계 3:21).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시 37:11) 게 될 때, 우리는 겸손과 극기를 통하여 그분의 후사가 될 수 있다. 온유한 자에게 약속된 그 땅은 사망과 저주의 그림자로 어두워진 이 세상과 같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계 22:3). 그곳에는 실망도 없고, 슬픔도 없고, 죄도 없고, 병들었다고 말할 사람도 없고, 그곳에는 장례행렬도 없고, 탄식도 죽음도 없고, 이별도 없고, 마음 상하는 일도 없다. 그곳에서는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그들을 이끌려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사 19:10).
18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의는 거룩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요일 4:16) 시다. 의는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의 모든 율법의 완성이"(롬 13:10)기 때문이다. 의는 사랑이며, 사랑은 하나님과 빛과 생명이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임으로써 의를 얻게 된다. 의는 고통스러운 투쟁이나 지치게 만드는 수고, 그리고 선물이나 희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고자 주리고 목말라하는 모든 영혼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이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사라"(사 55:1). "그들이 내게서 얻은 의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54:17).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6). 인간의 어떤 힘도 영혼의 주림과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것을 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니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19 육체적 힘을 유지하기 위하여 식물이 필요한 것처럼, 영적 생명을 유지하고 하나님의 사업을 할 힘을 얻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온 떡, 곧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우리의 육체가 생명과 활력을 유지해 주는 양분을 계속적으로 받는 것처럼, 우리의 심령도 그리스도로 더불어 계속적인 교제를 나누고 그분께 순종하고 완전히 의존해야 한다. 피곤에 지친 여행자가 광야에서 샘을 찾다가 찾으면 기갈을 푸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가 근원이신 생명의 정수(淨水)를 갈급함으로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 구주의 품성의 온전함을 깨달을 때, 우리는 완전히 변화되어 그분과 같은 순결한 모습으로 새로워지고자 갈망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알면 알수록 품성에 대한 우리의 이상이 더욱 높아지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나타내고자 하는 열망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서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시 62:5)고 간절한 마음으로 말하게 될 때, 하늘의 요소와 인간의 요소가 합해진다. 만일, 그대가 마음 가운데 어떤 부족을 느낀다면, 또한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면,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그대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것을 그대를 위하여 해 주시고자 그대의 마음에 역사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얕은 개울가에서 해갈하고자 애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큰 샘이 바로 우리 위에 있으며, 우리가 믿음의 길을 따라 조금만 더 높이 올라가면 그 풍족한 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20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샘이다. 그 생명의 샘을 찾으려고 노력할 때, 그대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교통을 나누게 된다. 잘 아는 진리가 새로운 측면에서 그대의 마음속에 제시되고, 성경의 구절들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섬광처럼 마음속에서 작열할 것이다. 그리하면 그대는 성경의 다른 진리들이 구속 사업과 갖는 관계도 깨닫게 되고, 또 그리스도께서 그대를 인도하시며 거룩한 선생이 그대 곁에 계신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고 말씀하셨다. 성령께서 그대에게 진리를 제시해줄 때, 그대는 가장 가치 있는 경험을 쌓게 될 것이며, 그대에게 계시된 위로되는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 주고자 갈망하게 될 것이다. 그들과 교제하게 될 때, 그대는 그리스도의 품성이나 사업에 관한 어떤 새로운 사상을 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과 사랑하지 않는 자들 모두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그분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새로운 계시를 갖게 될 것이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눅 6:38). 이와 같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아 4:15)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한번 맛본 사람은 그 사랑을 더욱 많이 받고자 끊임없이 부르짖는다. 그래서 나누어 주게 되면 더욱 풍성하고 더욱 많이 받게 될 것이다. 영혼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깨닫고 사랑하는 능력을 증가시켜 준다. 영혼의 계속적인 부르짖음도 "더욱"이고, 성령의 응답도 "더욱"이다(롬 5:9, 10). 이것은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엡 3:20) 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21 잃어버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비우신 예수님에게는 성령이 한량없이 주어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온 마음을 바칠 때는 누구나 그것을 받을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고 친히 명령하셨다. 이것은 명령이면서도 이 명령 자체의 성취에 대한 약속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충만으로 … 거하게"(골 1:19) 되고, "그 안에서 충만하여"(골 2:10) 지는 것이 아버지의 큰 기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땅을 소생시키는 소낙비처럼 당신의 사랑을 무제한으로 부어 주신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 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사 45:8).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자산에 강을 열며 골짜기 가운데 샘이 나게 하며 광야로 못이 되게 하며 마른땅으로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사 41:17, 18).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마 5:7).
사람의 마음은 날 때부터 냉랭하고 어둡고 사랑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비와 용서의 정신을 나타낼 때는, 언제나 자기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마음에 역사하는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하게 된다.
22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하나님은 모든 자비의 근원이시다. 그분의 이름은 "지혜롭고 은혜롭"(출 34:6)다. 그분은 우리를 우리의 가치에 의해 취급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지 묻지 않으시고, 우리를 가치 있게 해 주기 위하여 당신의 풍성한 사랑을 부어 주신다. 그분께서는 원한을 품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벌을 주려 하지 않으시고 구속하려 하신다. 당신의 섭리를 따라 나타내시는 엄격함도 실은 완악한 자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분께서는 사람들의 고통을 씻어 주고 그들의 상처에 향유를 발라 주고자 심히 갈망하신다. 하나님께서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안"(출 34:7)으심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죄는 제거해 주시기를 원하신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이 나타난다. 무한한 사랑이신 하나님과 일치되는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은 남을 교화시키기 위해서는 힘을 쓰되 남을 정죄하지는 않는다. 영혼 속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는 결코 마르지 않는 샘이다. 그분께서 거하시는 곳은 어디나 자비가 흘러넘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잘못을 범하는 자들, 시험을 당하는 자들, 궁핍과 죄의 희생물이 된 가련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을 때 그들을 도와줄 가치가 있을까 하고 묻지 않고, 내가 어떻게 하여야 그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 하고 묻게 된다. 그는 가장 가련하고 가장 비천한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면서까지 구원하려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시켜 화목의 봉사를 하도록 하신 영혼들을 본다.
23 긍휼히 여기는 자는 불쌍한 자들, 고난 중에 있는 자들, 압박당하는 자들에게 동정을 보이는 사람들이다. 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내가 부르짖는 번민과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건졌음이라 망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을 빌었으며 과부의 마음이 나로 인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 내가 의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는 도포와 면류관 같았었느니라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으며"(욥 29:12~16). 생애 자체가 고통스러운 투쟁이 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늘 부족을 느끼며, 괴로워하고 불신을 나타낸다. 자신들에게 감사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계속 투쟁하는 고독한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친절한 말과 동정의 표정과 감사의 표시는 마치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과 같은 것이다. 동정의 말 한마디, 친절한 행동 하나는 피곤한 어깨에 무겁게 지워져 있는 짐을 치워줄 것이다. 따라서 사심이 없는 모든 친절한 말과 행동은 잃어버린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현이다. 긍휼히 여기는 저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 11:25).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헌신적인 봉사의 생애에는 동정심을 가지는 데서 오는 만족 스런 평안 즉 즐거운 만족이 있다. 영혼 속에 거하시고 사람의 생애에 뚜렷하게 나타나시는 성령은 딱딱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동정심과 자비심을 불러일으켜 준다. 그대는 심은 대로 거두게 될 것이다.
24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시 41:1~3). 하나님이 자녀들을 위한 봉사로 생애를 하나님께 바치는 자는 누구나 우주의 모든 자원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분과 연결된다. 그의 생애는 변함없는 언약의 황금 고리로써 하나님의 생애와 하나로 이어진다. 주님께서는 고통과 궁핍의 시간에 그를 잊지 않으실 것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긍휼히 여기는 자는 가장 어려운 시간에, 긍휼히 여기시는 구주의 자비 안에서 피난처를 찾게 되고 영원한 거처로 영접받게 될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유대인들은 의식상 청결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하였기 때문에, 규칙들이 대단히 번거로운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은 규칙과 제약과 외관상으로 드러나는 불결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기심과 악의에 의해 심령에 얼룩지는 오점을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이 의식상 청결이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들 중 하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마음의 청결은 필요하다고 지적하신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약 3:127)이다. 더러운 것은 아무것도 하나님의 성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5 그곳 거민이 될 사람은 모두 이 세상에서부터 마음이 청결해져야 할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 배우고 있는 사람에게는 부주의한 행동과, 무례한 말과 조잡한 생각을 멀리 하는 경향이 차츰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마음 가운데 거하시면, 말과 생각과 행동이 순결하고 고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더욱 깊은 의미가 있다. 그것은 다만 항간에서 이해하는 의미의 순결, 다시 말해 감각적인 것에서 벗어나고 육욕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마음의 은밀한 목적과 동기가 진실하며, 교만과 자아 본위에서 벗어나 겸손하고 사심이 없고 어린애같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성질이 같아야만 서로 이해할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의 품성의 원칙이 되는 자아 희생적 사랑의 원칙을 생애에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그대는 하나님을 포학하고 잔인한 존재로 여긴다. 그래서 사람의 이기적 특성은 물론, 심지어 사단의 이기적 특성까지도 자비하신 창조자의 특성으로 간주된다. 그분께서는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시 50:21)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섭리가 전체적이고 징벌적인 성질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분의 충만한 은혜의 보고(寶庫)인 성경 역시 그렇게 이해되고 있다. 이 때문에, 하늘처럼 높으며 영원에 이르게 하는 성경상 진리들의 영광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가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로 비치고 있다. 그들은 그분을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사 53:2)는 분으로 생각한다. 예수께서 인성을 입으신 하나님의 계시로 사람들 가운데 계셨을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분에 대하여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요 8:48)고 주장했다. 그분의 제자들까지도 그들이 마음속에 있는 이기심 때문에 완전히 눈이 어두워져서, 아버지의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기 위하여 오신 그분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사람들 사이에서 고독하게 다니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분이 완전히 이해될 수 있었던 곳은 오직 하늘뿐이었다.
26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오실 때, 악한 자들은 그분을 바로 쳐다볼 수 없을 것이다. 그분의 임자의 빛은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생명이 되지만 불경한 자들에게는 죽음이 된다.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그들에게는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히 10:27) 것이 된다.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그들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돌아가신 그분의 얼굴을 피하게 해 달라도 간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거하심으로 정결하게 된 마음에는 모든 것이 바뀐다. 그런 마음은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모세는 여호와의 영광이 그에게 나타났을 때 바위틈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때는 그리스도 안에 숨겨져 나타나지 않을 때이다.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잠 22:11).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믿음을 통해 왕이신 하나님을 바라본다. 매일의 경험 가운데서, 그분의 섭리에 나타나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본다. 우리는 그분의 아들의 품성을 통하여 그분을 이해한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과 또 그분이 보내신 분에 대한 진리를, 잘 이해하고 마음에 받아들일 수 있도록 공개해 주신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구속주로 받아들이되 새롭고 절친한 관계를 바탕으로 그렇게 한다. 그리하여 그분의 품성의 순결함과 아름다움을 깨달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이 자신들을 통해 반영되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그분을, 회개한 아들을 포옹하고자 원하는 이 기쁨과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
27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의 위대한 손으로 창조된 업적과 우주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사물들을 통하여 창조주를 식별한다. 그들은 그분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그분의 자비와 , 그분의 선하심과, 그분의 은혜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더욱 분명히 읽게 된다. 지혜 있고 현명한 자들에게 감추어진 진리들이 어린아이들에게는 계시된다. 진리의 아름다움과 세상의 현자들에게는 식별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를 행하고자 하는, 믿음과 단순함이 깔린 열망을 가진 자들에게는 끊임없이 펼쳐지고 이해가 된다. 우리는 스스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됨으로 진리를 분별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주신 시간 동안 마치 그분이 눈앞에 계신 것처럼 생애 한다. 그들은 또한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이야기할 때 그랬던 것처럼 장차 불멸의 상태에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 13:12).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마 5:9).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사 9:6)이시다. 그러므로 죄가 깨뜨린 화평을 이 땅과 하늘에 회복시키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누구든지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마음을 여는 사람은 이 하늘의 화평의 참여자가 된다. 이 외에는 평화의 기반이 달리 없다. 마음속에 받아들여진 그리스도의 은혜는 적의를 제거하여 준다.
28 왜냐하면 분쟁을 완화시켜 주고 심령을 사랑으로 채워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로 더불어 화목하게 지내는 사람은 불행해질 수 없다. 질투가 마음속에 있을 수 없고, 좋지 못한 추측이 용납될 수 없으며, 증오가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과 조화를 이룬 사람은 하늘의 평화에 참예한 자이며 그 복된 감화를 사방으로 널리 퍼뜨리게 될 것이다. 화평의 정신이 세속적인 투쟁으로 피곤하고 거칠어진 사람들의 마음에 이슬과 같이 내릴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평화의 기별을 가지고 세상으로 보내진다. 자신도 몰래 조용히 거룩한 생애의 감화를 끼치는 자는 누구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낼 것이다. 언행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버리고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게 하는 자는 누구나 화평케 하는 자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평화의 정신은 그들이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스도의 달콤한 향기가 그들을 두르고 있다. 생애의 향기와 품성의 아름다음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낸다.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요일 4:7).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나,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9, 14).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에게로서 내리고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미 5:7).
29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세상의 영광과 부를 얻고 시련이 없는 생애를 맞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하는 대신에, 세상이 그들을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함께 극기와 굴욕의 길을 걷는 특권을 가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잃어버린 세상을 구속하기 위하여 오신 그분은 하나님과 인간의 적인 원수들의 연합 세력에 부딪히게 되었다. 악한 사람들과 악한 천사들은 단숨에 해치우려는 마음으로 동맹을 맺고 평화의 왕을 대적하기 위하여 대오를 가다듬었다. 그분의 모든 언행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같지 않은 그분의 모습이 다할 수 없는 적의를 품게 했다. 그분은 우리의 본성에 속한 악한 정요기 발휘되도록 방종을 허락하지 않으심으로 가장 격렬한 반대와 적의를 불러일으키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도 그와 같다. 의와 죄, 사랑과 증오, 참과 거짓 사이에는 억제할 수 없는 갈등이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결의 미를 나타낼 때, 그것은 사단이 나라에 속한 백성을 빼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악의 왕이 그것을 대항하기 위하여 일어난다. 박해와 치욕이 그리스도의 정신에 젖어 있는 모든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박해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그 원칙 곧 그 아래 깔려 있는 정신은 아벨 시대 이후로 지금껏 주님의 택한 자들을 살해 해온 바로 그것이다.
30 사람들이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고자 애쓸 때, 그들은 십자가에 대한 공격이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정사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 하늘의 법칙을 순종하는 모든 자들을 대항하기 위하여 대오(隊伍)를 벌이고 있다. 그러므로 핍박은 슬픔의 원인도 되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기쁨을 가져다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시련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겠는다는 약속하지 않으셨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좋은 것을 약속하셨다. 그분께서는 이런 말씀들을 주셨다.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신 33:25).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만일, 그대가 예수님을 위하여 시뻘겋게 단 풀무 속을 지나도록 요구당한다면, 그분께서는 바벨론에서 진실한 세 사람과 함께 계셨던 것처럼 그대 곁에 계실 것이다. 구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그분과 함께 굴욕과 치욕을 당할 때마다 기뻐할 것이다.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들은 그분을 위해 받는 고통을 달게 여긴다. 각 시대를 통하여,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해 왔다. 그는 그들을 고문하고 죽였으나, 그들은 죽음으로써 승리자가 되었다. 그들은 확고부동한 믿음으로 사단보다 더 강하신 분을 나타내었다. 사단은 고문하고 몸을 죽일 수는 있었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을 건드릴 수 없었다. 그는 감옥의 벽속에 감금시킬 수는 있었으나 정신은 속박할 수 없었다. 그들은 어둠 저편에 있는 영광을 바라볼 수 있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원저자 : 엘렌 G. 화잇
발행처 : 시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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