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로마에 도착함
제주도에서
로마에 도착함
항해가 시작되어 백 부장과 죄수들은 로마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알렉산드리아 배 카스토르 앤드 폴 럭스호는 로마로 가는 도중 멜리데에서 과동(過冬)했으며, 이 배를 타고 여행자들은 출항했다. 다소 역풍으로 지체는 되었으나 항해는 안전히 이루어져 그 배는 이탈리아 해안에 있는 보디올의 아름다운 항구에 닻을 내렸다. 이곳에 몇몇 그리스도인들이 있어, 그들이 바울에게 이레를 저희와 함께 유할 것을 간청했고, 백 부장은 친절하게 허락해 주었다.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를 받은 후, 이탈리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의 방문을 열렬히 고대하고 있었다. 그가 죄수가 되어 오는 것을 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나. 그의 고통은 더욱더 그들의 사랑을 받게 하였다. 보디 올과 로마 사이에 거리는 224km 나 되었지만, 그 항구는 수도와 통신이 빈번하였으므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도착 소식을 듣고,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바울을 만나 환영하려고 출발했다. 상륙한 지 8일 만에 백 부장과 그의 죄수들은 로마로 출발했다. 율리 오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호의를 기쁜 마음으로 허락했으나, 죄수라는 그의 처지를 바꿀 수는 없었고, 파수병의 사슬에서 풀어 줄 수도 없었다. 바울은 무거운 마음으로 오랫동안 기대해 왔던 세계의 수도를 방문하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예상했던 것과는 얼마나 다른 환경이었던가? 족쇄를 차고 오명을 쓴 그가 어떻게 복음을 선포할 것인가? 로마에서 많은 영혼을 진리로 인도하려고 했던 그의 희망은 실망으로 운명 지어진 것처럼 보였다. 여행자들은 로마에서 64km 떨어진 압비오 저자에 도착했다. 그들은 큰 도로에 모인 무리들 사이를 지나갈 때, 냉담하게 보이는 죄수들의 무리와 함께 사슬에 매인 백발의 노인은 많은 경멸의 시선을 받았으며, 격렬한 조롱의 대상 되었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 중 아무도 그에게 연민이나 동정의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겸손히 사슬에 묶인 채 말없이 그리고 천천히 그의 길을 갔다. 돌연히 기쁨으로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고, 지나가던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나와, 마치 아들이 오래 헤어져 있던 아버지를 환영하듯이 한 죄수의 목을 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했다. 그 장면은 거듭거듭 반복되었다. 그 사랑스러운 행위가 사람의 눈을 밝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 사슬에 매인 죄수가 고린도에서, 빌립보에서, 에베소에서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분별해 냈다. 온정이 넘친 제자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의 복음의 아버지 주위로 모여들자, 일행 전체가 정지하게 되었다. 군사들은 지체되는 것이 초조했으나, 이 즐거운 회합을 방해할 마음은 없었다. 군사들도 그 죄수를 존경하고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었다. 피로와 고통에 지친 바울의 얼굴에서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모습이 반사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바울에게 그들이 그를 잊지 않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의 생애를 활력 있게 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평화를 준 기쁨 충만한 소망으로 인해 바울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그들은 허락만 되었다면 사랑의 열정으로 로마 도성까지 바울을 그들의 어깨에 메고서라도 갔을 것이었다. 바울이 그의 형제들에게 한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행 28:15)라고 한 말, 곧 누가가 기록한 이 말의 의미를 깨닫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이 죄수임에도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군중들이 자신을 동정하며 눈물짓는 가운데 사도는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했다. 그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던 슬픔의 구름은 사라졌다. 그의 그리스도인 생애는 시련과 고통과 실망의 연속이었으나, 그 시간에 그는 풍부한 보상을 받았다는 느낌을 얻었다.
소망도 하나님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짙은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수많은 영혼에게 영원한 생명과 평화의 빛을 전할 수 있는 특권을 받은 것에 대해 기뻐했다. 그는 과거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고,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속박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영원한 속박으로부터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는 평생의 사업을 주셨다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고통을 기쁘게 생각했다. 로마에 도착하자 백 부장 율리오의 임무는 끝났다. 여기서 그의 죄수들을 황제의 근위대장에게 인계했다. 사도는 백부장이 그에 대하여 좋게 보고한 것과 베스도의 편지 때문에 근위대장의 호감을 삼고 투옥되는 대신 자신이 세로 얻은 집에 머물도록 허락을 받았다. 비록 그는 여전히 한 병사의 쇠사슬에 매여 있었으나, 그의 친구들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사업을 전진시키기 위해 일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몇 년 전에 로마에서 추방되었던 많은 유대인이 다시 돌아오도록 허락되었기 때문에, 많은 수가 이제 로마에 있게 되었다. 바울은 무엇보다도 그의 원수들이 유대인들을 격분케 하여, 그를 대적하게 할 기회를 가지기 전에 이들에게 자신과 자신이 사업에 대한 사실을 제시하려고 결심했다. 그래서 로마에 도착한 지 삼 일 후에, 그는 그들의 지도자들을 모두 불러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그가 죄수로서 로마에 오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바울은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행 28:17~20)고 말했다. 그가 유대인들의 손에 당했던 학대나 그를 암살하려는 그들의 거듭된 음모에 대하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에는 신중함과 친절함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자기 개인에게 주의를 끌거나 동정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고 진리를 옹호하고 복음의 영광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에 대한 답으로 청중은 그들이 공한이나 사신으로 그를 대적하는 비난을 들은 적이 없고, 로마에 온 유대인들은 아무도 그에게 어떤 죄를 씌우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을 위해 그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가진 이유를 듣고 싶은 강렬한 희망을 나타냈다. 그들은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행 28:22)고 말했다. 그들이 스스로 이것을 갈망하는 이상,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할 수 있는 날을 정하라고 부탁했다. 작정한 시간에 많은 사람이 함께 왔다.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행 28:23)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말했고 구약 성경의 논증을 단순하고 성실하고 능력 있게 제시했다. 어떤 사람들의 마음에는 그의 말이 결코 사라지지 않을 인상을 남겼다. 진리를 정직하게 구하는 사람들은 그가 아는 것을 말하고, 그가 본 것을 증거 할 때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도는 신앙이란 의식이나 예식, 신조나 교리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했다. 만일 그렇다면 육에 속한 사람은 그가 세상 사물을 이해하는 것처럼, 연구에 의하여 신앙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신앙이란 실제적인 구원의 능력이요, 전부 하나님께로부터 온 원칙이며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이 영혼에게 임하는 것을 각 사람이 체험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바울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할 선지자로 어떻게 그리스도를 지적했으며, 어떻게 모든 선지자가 그분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치료제요, 죄인들의 죄를 지셔야 할 부죄이신 분으로 증거 했는지 설명했다.
그들의 형식과 의식의 준수에 대해 잘못을 찾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의문의 예식은 매우 엄밀하게 유지하면서도, 그 모든 제도의 원형이 되시는 그분을 거절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바울은 그가 회개하지 않았을 때는, 오실 메시아의 성격과 사업에 관하여 개인적인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같은 생각으로 그리스도를 알았노라고 고백했다. 그가 나사렛 예수를 사기꾼으로 거절했던 것을 그분께서 이런 생각을 충족시켜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이 회개한 이후에 그리스도와 구분의 사명에 대한 견해는 매우 신령했고, 오랫동안 약속받았던 메시아에 대해 유대인들이 가진 개념에 비해 훨씬 고상하게 되었다. 그는 육체를 따라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소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헤롯은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쓰셨을 때 그분을 보았다. 안나스도, 빌라도와 제사장들과 관원들도, 로마의 군사들도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보지 않았고, 영광을 받으실 구속주로서 보지 않았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 곧 그리스도에 관한 영적 지식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 그분과 개인적 친분을 맺는 것은 더 바람직한 일이었다. 지금 바울이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단지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교제보다 더욱 친밀하고 더욱 지속적인 것이었다. 바울의 말을 들은 사람 중 어떤 사람은 그 진리를 간절한 마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완고하게도 거절했다. 그들과 동등하고 또는 정신력에 있어서 더 우월한 사람, 성령에 의해서 특별한 빛을 받은 사람이 성경의 증거를 그들 앞에 제시했다. 그의 논증을 반박할 수 없었는데도, 그의 결론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했다.
랍비들이 그리스도께 적용했던 예언들이 이 반대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골칫거리였다. 왜냐하면 사도가 그들에게 바로 이 예언들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겸손한 예루살렘 입성, 백성들에게 거절당한 일, 유대의 배신, 그를 배신한 대가로 받은 돈의 액수, 악인처럼 당한 그의 죽음, 그가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감각을 마비시키기 위해서 드려진 식초, 제비 뽑아 나누어 가진 그의 속옷, 제삼 일에 그의 무덤이 열리고 부활하여 죽음을 이기신 일, 그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긍극적으로 높여진 일, 이 모든 것이 선지자가 말한 대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보다 더 결정적인 논증이 제시되면 될수록, 강퍅한 유대인들은 더욱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악의적으로 광란의 상태가 되어 나사렛 예수는 사기꾼이라는 그들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더 이상의 논증은 무용지물이었다. 바울은 엄숙하게 연설을 끝냈다. 그는 그들에게 이사야의 말을 적용했다. 이 말씀은 이전에 그리스도께서도 인용하셨던 말씀이다.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행 28:25~27). 바울의 말이 전혀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세상의 구세주로 온전히 받아들였다. 심지어 전에 그들의 형제였던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리의 열성적인 대변자가 되었다.
마지막이 가까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는 하나님 백성들이 바울의 경험에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 가장 분명한 증거에도 납득되지 않고, 진리에 대한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낙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시대의 형식적이고 세상을 사랑하는 교회들이 예전 사람들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의 최악의 적은 유대인들이었으며, 자신이 경건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마 22:29)도다. 오늘날 진리의 가장 격렬한 반대자는 스스로 진리의 옹호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율법의 보관자가 되게 하셨다. 그들은 거짓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의 반대에 대항하고, 학식과 지위와 권세를 가진 사람들을 대항하며, 짓밟힌 율법의 주장을 지지해야 한다. 그 원수들이 거듭거듭 전장(戰場)으로 나와서 똑같은 논쟁을 할지라도 그 힘 있는 주장의 증거를 결코 뒤엎을 수 없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와 가르침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들이 인정하지 않은 진리를 옹호하는 그를 볼 때, 질투와 악의에 가득 찼다. 그들은 그가 자기들보다 결코 앞서 가지 못하도록 하려고 작정을 했다. 만일 그들이 베뢰아 사람들처럼 겸손하고 배우려는 자세로 성경을 살폈더라면, 바울이 전했던 그 진리를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 입장을 유지하고 그를 정죄하기 위해서만 연구를 했다. 진리는 항상 고난을 동반한다. 불신자들은 믿는 사람들을 반대하고 비웃는다. 반대의 폭풍우를 일으켰다는 사실이 진리가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선지자와 사도들은 하나님께 양심적으로 순종했기 때문에 그들의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라고 선언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물려받은 유산이다.
저 자 : 엘렌 G. 화잇
출 판 : 시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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