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아그립바 앞에서의 청원
제주도에서
아그립바 앞에서의 청원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했기 때문에, 베스도는 그를 로마로 보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적당한 배를 구할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고 그리고 다른 죄수들도 바울과 함께 보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소송에 대한 고려도 역시 지체의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가이사랴의 유대인과 이방인 양쪽의 요인(要人)들 앞과 또한 유대인의 왕이라는 직분을 가진 헤롯 왕조의 최후의 왕 앞에서 그의 신앙의 이유를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바울에게 주었다. "수일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에게 문안하러"(행 25:13) 왔다. 아그립바가 유대의 율법과 관습에 대해 정통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베스도는 그의 방문 기간 동안 벨릭스에 의해서 투옥되어 있는 바울의 사건에 대해 그의 관심을 촉구했다. 베스도가 이야기할 때 아그립바는 흥미가 생겨 자기도 이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는 희망을 표했다. 그의 희망에 따라 다음 날 모임이 이루어졌다. 바울은 이제 새로운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아닌 단지 개인적 청중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자리에 서게 되었다. 가이사랴의 부자와 귀족 계급의 대표해서 초청된 총독의 특별한 손님을 위한 것이었다. 왕족으로서 모든 휘황찬란한 것으로 장식하고 아그립바와 베니게는 강당으로 갔다. 동방으로부터 그를 수종한 무리들도 값비싼 동방의 사치품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자랑스럽게 거만을 떠는 통치자는 그의 아름다운 자매와 함께 청중을 스쳐 지나서 총독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의 명령에 따라 여전히 죄수 취급을 받는 바울이 안으로 들어오자 왕은 질병과 오랫동안의 감옥 생활 그리고 계속적인 초조함으로 등이 굽고 얼굴은 창백해진 그를 냉랭한 호기심으로 바라보았다. 여기에 얼마나 뚜렷한 대조가 나타났던가! 아그립바와 버니게에게는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보실 만한 품성의 특징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자들이었고, 마음과 생활이 부패했다.
하나님과 천사들은 그들의 행위를 싫어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는 호의를 누리는 사람들이었다. 파수병의 쇠사슬에 매인 늙은 죄수는 외모에 있어서 세상이 그에게 호의를 표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친구도, 재물도, 지위도 없이 죄수가 된 이 사람을 보이지 않는 이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하늘의 천사들이 그의 수종자들이었다. 만일 이 빛나는 사자들 중 하나의 영광이라도 비쳐 나왔더라면 왕의 화려함과 교만은 창백해졌을 것이며, 왕과 궁신들은 그리스도의 무덤 곁에 있었던 로마의 파수병들처럼 땅에 넘어졌을 것이다. 온 하늘은 지금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 때문에, 구속된 한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랑받는 제자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요일 3:1).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또한 그리스도를 모본으로 삼는 사람들도 알지 못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고 왕족의 자녀들이지만, 왕자라는 주장을 세상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호기심을 발동하지만 인정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베스도는 다음과 같은 말로 모인 무리에게 바울을 소개하였다. "아그립바 오아과 같이 있는 여러분이여, 당신들이 보는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치되 살려 두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여 예루살렘에서와 여기서도 내게 청원하였으나, 나는 살피건대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더이다 그러나 저가 황제에게 호소한 고로 보내기를 작정하였나이다. 그에게 대하여 황제께 확실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으므로 심문한 후 상소할 재료가 있을까 하여 당신들 앞, 특히 아그립바 왕, 당신 앞에 그를 내어 세웠나이다 그 죄목을 베풀지 아니하고 죄수를 보내는 것이 무리한 일인 줄 아나이다"(행 25:24~27). 아그립바 왕은 이제 바울에게 자신을 위한 변명할 기회를 주었다.
세상의 부와 지위가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사도는 그와 청중의 눈부신 허식이나 높은 계급 때문에 당황하지 않았다. 총독과 그의 귀빈들의 인상적인 의상, 병정들의 검, 지휘관들의 갑옷, 이런 것들은 조금도 그의 용기를 위압하거나 자제력을 잃게 하지 못했다. 그 의 묶인 오른손을 펼쳐 들고 이렇게 말했다.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니다"(행 26: 2~3). 이러한 말이 아그립바 왕으로 자신의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여 바울이 전파하고 있는 바로 그분을 대적하기 위해 자기 조상들이 헛되이 애썼던 것을 마음으로 생각하게 했을까? 그의 증조부인 헤롯이 베들레헴의 순진무구한 어린애들을 살해했던 것을 생각했을까? 또한 그의 작은할아버지 되는 안티 바스가 침례 요한을 살해한 것을 기억할까? 그의 아버지인 아그립바 1세가 사도 야고보를 살해한 것도 기억하고 있을까? 하나님의 종들에게 저지른 이 왕들의 죄의 결과로 하나님이 불쾌하신 증거가 신속히 그들에게 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을까? 그날의 화려함과 과시가 아그립바로 자신보다 한층 더 강한 권력을 소유하였던 자기 부친이 같은 도시에 서서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고 백성들이 그를 신으로 환호했던 때를 기억나게 했을까? 그 환호 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신속하고도 두려운 복수가 그 자만에 가득 찬 왕에게 임했던 것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 중에 어떤 것들이 아그립바의 기억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 앞에 펼쳐져 있는 화려한 광경에 그의 허영심은 우쭐해졌고, 그의 교만과 자부심이 그 모든 귀중한 생각을 쓸어 가 버렸다.
바울은 완고한 불신으로부터 나사렛 예수를 세상의 자신의 회심(回心)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계시, 즉 자신이 경멸하고 증오하여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박멸하려고 쫓아다니기까지 한 그분이 보좌 중앙에 좌정해 계신 계시, 비록 그 계시가 이후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가장 큰 위로의 근원으로 나타났지만 당시에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공포로 가득 찼던 하늘로부터 온 계시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 시간 이후로 바울은 자비의 은혜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고, 신실한 참회자가 되었으며 예수를 열렬히 믿는 사람이 되었다. 그 후에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고전 1:1)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한 번도 그분을 뵌 적이 없었다. 그의 말과 행하신 일을 실제로 들었으나 약속된 메시아가,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모든 축복의 수여자께서 세상에 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권능의 옷을 입고, 왕실의 화려함에 둘러싸여, 천사의 무리가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선포하는 그런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라면, 비천한 사람으로 오셔서 온유와 겸손으로 생명의 말씀을 전하실 것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 고상한 감성을 깨우고, 그 소원을 만족시키며, 생명의 사업과 투쟁에 대해 무한한 보상으로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이었다. 바울은 메시아가 오셔서 외국의 왕들에게 속박되어 있는 나라를 구해 주실 것이라고 헛되이 바라보았으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로부터 구원해 주실 구세주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삶이 그에게는 맹목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투쟁이었고, 불평등한 전투였으며,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열병이었다.
그 이후로 그의 열망은 채워졌고, 두려움은 사라졌으며, 그의 짐은 가벼워졌다. 그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기록했던 나사렛 예수, 세상이 구주를 발견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이 왜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느냐고 논박했다. 한 때 그에게도 그렇게 보였으나, 이후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어찌 불신할 수 있겠는가?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사신 것을 증언할 수 있었는데, 그가 십자가에 달리셨고,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고, 또 그분이 예루살렘의 거리를 거니셨으며, 갈보리에서 돌아가셨고, 죽음의 결박을 깨셨고 그리고 감람산에서 하늘로 승천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게바와 야고보, 요한이 그리고 다른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실제로 그분과 만나고 대화를 나누었다. 하늘로부터 온 목소리가 그를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눈을 뜨게 하라고 보내셨고 그들이 암흑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이켜 죄의 용서를 받고, 거룩하게 된 자들로 유업을 얻게 하셨는데 어찌 그 명령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다메섹과 예루살렘 그리고 온 유대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에 어울리는 일관된 삶을 누리도록 말씀을 전파했다. 이것, 바로 이것 때문에 유대인들이 그를 성전에서 체포하여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번과 또 다른 위험에서 그를 건져 주셨다. 그가 나사렛 예수와 관련해 증언한 것은 결코 신성 모독이 아니요, 이단이나 배교가 아니라, 모세와 선지자의 모든 가르침과 완벽하게 조화되는 진리였다. 사도는 그의 사명에 가장 강력한 동력을 주었던 그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를 엄숙하고, 진지하며, 열성적인 태도로 다루었다. 그 주제에 대해 모든 열정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의 눈에는 왕도, 총독도, 사령관도 그리고 부나 계급이나 지위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삶의 목적의 증거를 들려주기 위해서, 오랫동안 익숙하게 해 왔고, 강력한 신념으로 타오르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 중 아무도 그의 진실성을 의심할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그의 웅변이 고조에 달했을 때 갑자기 그의 말이 중단되었다. 관련된 사실이 베스도뿐 아니라 함께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모든 청중은 숨을 죽이고 바울의 놀라운 환상의 경험과 계시와 고대의 예언들 그리고 거절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한 유대인이 죽음으로부터 다시 부활해 승천한 이야기, 또한 오직 그분만이 죄를 용서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어둠에서 밝혀 줄 사람이라는 것을 들었다. 마지막 말은 베스도로서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갑자기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 26:24). 사도는 대답하였다.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정신 차린 말을 하나이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행 26:25~26). 그러고는 아그립바를 향하여 직접적으로 말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행 26:27). 그 유대인의 왕은 율법과 선지자에 대해서 배웠고, 바울이 말한 어떤 부분에 대해서도 충분히 믿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논의된 것들이 베스도에게는 너무도 새롭고 생소한 것이었지만, 아그립바에게는 매우 분명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그의 타오르는 열정은 채찍질이나 투옥으로 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깊은 감동을 받아 한동안 그의 회중들과 직위의 위엄을 잊어버렸다. 그가 들은 진리만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사신으로 그의 앞에 선 비천한 죄수만을 바라보던 아그립바는 무의식 중에"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대답하였다. 사도는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 26:29)라고 엄숙하고 진지하게 대답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결박된 손을 들어 "이렇게 결박된 것 이에는 "이라며 말을 덧붙였다. 그의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그가 평범한 죄수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가 말한 것처럼 말하고 그가 논증한 것처럼 그렇게 논증하고 영감의 믿음으로 의기충천(衝天)한 사람,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토록 풍성하고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그토록 평화로운 침착성을 소유한 사람은 결코 없었다. 모든 위엄 있고 고상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희망, 신뢰, 믿음이 자신을 뒷받침해주기를 기원했던 사람, 어떠한 복수의 정신도 갖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하였던 투쟁, 슬픔, 고난으로부터 면제되기를 기도했던 이와 같은 사람이 사기꾼이 될 수는 없었다. 베스도와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의당히 사도를 속박한 쇠사슬을 차야 했다. 이들은 모두 중한 죄를 범했다. 이 범죄자들은 그날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구원의 제의를 들었다. 적어도 그중 한 사람은 은혜를 받아 죄 사함을 받도록 거의 설득되었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제공된 은혜를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속주의 십자가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했다. 아그립바 왕의 호기심은 만족되었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남으로 회견이 끝났다는 것을 나타냈다. 회중은 흩어지면서 저희끼리 바울의 사건을 자유롭게 토론했다.
사람들은 그가 열정이 지나치거나 광적인 사람이 아니며, 사형에 처하거나 투옥될 일을 저지른 게 아니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아그립바는 유대인이었으나 바리새인들의 완고한 열심과 맹목적인 편견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는 폭력에 의해서 생각의 자유가 압박당하는 것을 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는 베스도에게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행 26:32)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상위의 법정에 제소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베스도와 아그립바의 재판권 밖에 있었다. 이제 그로부터 두 해 후에, 그날의 소송은 하나님의 사업에 그토록 필요한 소중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베스도는 자신이 맡은 재판 사건이 로마법에 따르면 성전의 수호자들인 유대인의 입장에 관련된 것이므로 이 죄수를 처벌할 법적인 어떤 혐의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내용을 담은 서신을 황제에게 보냈다. 그리고 네로 황제가 그토록 잔인하고 파렴치한 사람이었음에도 루시아, 벨릭스, 베스도, 아그립바가 결백하다고 선언한 사람을, 또한 산헤드린 공회도 그를 유죄로 판정할 수 없었던 사람을 감히 사형에 처할 수가 없었다.
저 자 : 엘렌 G. 화잇
출 판 : 시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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