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가이사의 집
제주도에서
가이사의 집
복음은 언제나 비천한 계층의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가난하고 친구가 없는 바울이 부요하고 지위가 높은 계층인 로마 시민의 주목을 끌 수 있으리라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들의 신체적, 정신적, 도덕적 생애는 바울의 생애와 다른 수준의 것이었다. 부도덕은 그들에게 온갖 찬란한 유혹을 제시하여 그들을 자발적인 포로로 붙잡았다. 그러나 수고에 지치고 빈곤에 지쳐 압박의 희생자가 된 그들 가운데서 그리고 가난한 노예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기쁨으로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가운데서 고난의 운명 아래서도 그들에게 위안을 준 희망과 평화를 발견했다. 사도의 사업은 비천한 하류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감화는 계속 퍼져 나갔으며, 마침내 황제의 궁전에까지 미쳤다. 로마는 그 당시 세계의 수도였다. 거만한 가이사들은 세상의 거의 모든 국가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법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궁신들은 비천한 나사렛 사람을 알지 못하거나 그분의 미워하고 조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년도 채 못 되어 복음은 죄수의 천한 집에서 황제의 거실로 가는 길을 찾았다. 바울은 악인처럼 속박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딤후 2:9)였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안부를 전하는 중에 사도는 우선 가이사의 집에 있는 사람들을 언급했다. 이 세상에서 악의 괴물을 우두머리로 두고 있는 로마의 궁중만큼 그리스도인들이 살리에 불편한 곳은 세상에 다시없다.
네로는 그의 마음에서 신성(神性)의 마지막 흔적뿐 아니라 인간성의 흔적까지 말살시킨 것처럼 보였으며, 오직 사탄의 각인(刻印)이 찍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시종들과 궁신들도 대체로 그와 같은 성격을 가졌고, 사납고 저열하며 부패했다. 여러 가지로 미루어 볼 때, 그리스도교가 네로의 궁정에서 벌판을 마련하기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많은 다른 경우에서처럼 이 경우에도 그의 싸움의 병기는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후 10:4)는 바울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네로의 가족 내에서까지 십자가의 전리품인 영혼들을 얻었다. 매우 비열한 왕에다 역시 비열한 시종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회심자들을 얻었다. 이 사람들은 은밀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요, 공공연한 그리스도인 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앙과 경험에 있어서 노련한 사람들에게 가장 따뜻한 애정을 나타냈으며 그들을 형제로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리스도교가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보이는 이곳에서 어떻게 그리스도교가 들어가서 확고한 발판을 구축하게 되었는가? 이전에 바울은 사람의 마음을 끄는 능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신앙을 공공연하게 선포했고, 표적과 기사로 그 신앙의 거룩한 성격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증거로 보여 주었다. 그는 헬라의 현인들 앞에 고상하고도 확고부동하게 서서 그의 지식과 웅변으로 거만한 철학의 논증을 침묵시켰었다. 그는 대담한 용기를 가지고 왕들과 총독들 앞에 서서 의와 전제와 장차 올 심판에 대해 논했으며, 마침내 거만한 통치자들은 마치 하나님의 날의 공포를 벌써 본 것처럼 두려워 떨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회들은 이제 사도에게 허락되지 않았고, 자기의 거처에 감금되어 그곳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만 진리를 선포할 수 있었다.
그는 모세와 아론처럼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지고 방탕한 왕 앞에 가서, 위대하신 "스스로 있는 자"의 이름으로 그의 잔인과 학정을 책망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지도 않았다. 그러나 복음의 최고의 옹호자가 표면상으로 공적 활동을 중단당한 것처럼 보인 바로 그때, 복음은 일대 승리를 얻었다. 이는 왕의 가족들이 회개하고 교인이 된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네로의 가족 종에 신앙으로 회심한 사람들을 얻는 데 성공한 것을 두고 그의 투옥 덕분으로 돌렸다. 그의 고통이 복음의 발전에 방해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나 않을까 염려한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보증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는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빌 1:12~13). 궁정의 관심이 그리스도교로 이끌린 것은 바울의 설교가 아닌 그의 속박 때문이었다. 그가 통치자들을 정복한 것은 포로로 있을 때였다. 매우 많은 영혼에게서 죄악의 생활 가운데 붙들어 매여져 있는 속박을 끊어 준 것은 그가 매여 있을 때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빌 1:14). 오랫동안 부당한 감금을 당하면서 바울의 인내와 명랑함, 그의 용기와 신앙은 대중의 관심을 끌었고, 수많은 사람의 마음에 확신을 주어 이런 고통을 받으려는 자발적인 마음을 주었는데, 이것은 그가 옹호한 교리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고통과 투옥 속에서도 유쾌한 그의 모습은 세상의 불운과 괴로워하는 세속적 정신과 매우 달랐다.
이것으로 그의 정신은 세상의 능력보다 더 높은 능력이 그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의 모본은 다른 그리스도인들로 더 큰 활력을 얻도록 분발하게 했다. 그들은 진리의 옹호자가 되는 일에서 그리고 바울이 일시적으로 물러나 있는 사업을 진전시키는 일에서 실패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능력과 유용성이 단절되고 모든 형세로 보아 그가 최소한의 일밖에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을 때, 그가 진적으로 제외된 것처럼 보인 들판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곡식 단들을 거둬들였다. 하나님의 종이 그의 활동적인 업무 가운데서 물러나고, 더 이상 그의 격려와 책망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는 좁은 안목으로 이제 그의 유용성은 끝났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가 자주 비탄해하는 일을 통해 신비스러운 섭리를 사용하신다. 그리고 그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성취할 수 없는 사업을 성취시키신다. 고통과 쇠약한 가운데서도 유쾌함을 보였던 그리스도인 들이나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침착과 평화를 유지하는 이들은 복음의 적들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모든 노력을 다해 그들을 회개시키려 노력한 것보다 훨씬 더 큰일을 성취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종들이 오류와 미신이 횡행하는 것에 대항해 활동적인 적진을 통과할 때, 그들은 복음의 방어를 위해 주께서 맡기신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의 악의로 말미암아 바울처럼 핍박을 당하고, 활동이 중단되고, 감옥에 갇히며, 드디어는 교수대나 화형 주에 끌려갈 때, 오히려 진리는 더 큰 승리를 열을 수 있다. 이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자신의 피로 그들의 증거를 인 쳤을 때, 지금까지 의심과 의문 속에 있는 영혼들이 그리스도의 신앙을 확신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용감하게 일어섰다. 순교자들이 불탄 재에서 하나님을 위한 풍성한 수확을 거뒀다. 더 이상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를 위하여 공적인 활동을 할 수 없을 때,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해야 할 봉사가 없고, 얻을 보상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참된 종들은 결코 버려지지 않는다.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살 때나 죽을 때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사용하신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가장 빛나고 주의 약속이 가장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때는 고통과 절망, 시련 그리고 핍박의 어둠 속에 있을 때이다. 그리고 무덤이 하나님의 자녀를 받아들일 때, 그 죽음이 증거 할 것이다. 그의 사업은 계속될 것이다. 그의 훈계와 격려의 말들에 대한 기억들, 모든 상황에서도 진리에 굳건하게 섰던 모습은 그가 살았을 때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말할 것이다. 용기와 마찬가지로 인내가 있어야 승리한다. 시련 중에서도 온유한 것은 사업에 있어서 담대한 것 못지않게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명백한 우용 성이 중단당하며, 수고의 짐을 내려놓고 투쟁으로부터 벗어나 휴식을 취하며 주의 발아래서 즐거운 교훈을 배우고 있다면, 그들의 주인께서 그들이 활동적으로 일할 때보다 그들이 일에서 물러날 것처럼 보일 때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리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그 도시에서 크게 복음이 승리 하리라고 기대했다. 바울은 많은 나라에 진리를 전했고, 대도시들에서 진리를 반포했었다. 이 진리의 투사가 네로의 궁정에서까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에 성공을 거둘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바울이 죄수가 되어 로마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희망은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들은 복음이 이 큰 중심지에 일단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면 모든 민족에게 신속히 퍼져 나가 세상을 지배하는 세력이 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다렸다.
그들이 실망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러나 인간의 기대는 실패했으나 하나님의 목적은 실패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가 바라던 만큼은 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년 동안의 감옥 생활에 끝나기 전에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빌 1:13). 그래서 그는 빌립보에 보낸 편지의 인사에서 맨 먼저 가이사의 집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매우 암담한 환경에서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의 열심과 성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람들의 그에 못지않은 신앙과 순종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태만과 믿음의 부족을 꾸짖는다. 우리 인간의 근시안적 판단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사업을 제한하지 말자. 가장 희망 없는 일터에서라고 그리스도께 영혼을 인도하는 일에 핑계를 대지 말자. 바울과 그의 뒤를 따르는 일꾼들이 가장 무서운 시험을 당하고, 가공할 만한 장애물들에 둘러싸이고, 거센 반대에 직면한 상황에서 네로의 종들에게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초청하는 것을 헛된 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진리를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복음에 순종할 것인가? 그러나 믿음으로 이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을 들었던 자들 가운데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고도 순종하려고 결정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장애아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 빛을 받아들였고, 그들의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비출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와주실 것을 믿었다. 종교적인 생활에 있어서 불리한 환경에 놓이게 되고 혹은 더 큰 희생이 요구되며 다 큰 위험을 만나고 또는 자신에게 더 맹렬한 반대가 이르러 올지라도, 가이사의 궁정에서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이교도의 신앙을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바꾸어 놓는 일을 하게 하시는 분이 누구인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이런 곳에 있을 수 없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도 믿음이 없다. 그들은 오직 바람직한 결과가 예상되는 곳에서만 그리스도와 그의 사업을 위해서 일하려고 한다. 거룩한 은혜는 모든 진실한 신자들의 노력에 함께할 것이다. 그 은혜는 모든 상황에서 우리에게 충분하다. 그리스도의 영께서 새롭게 하시며 완전하게 하시는 능력을 순종하며 충성스러운 모든 사람 위에 발휘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위대한 "스스로 있는 자"시요, 존재의 근원이시며, 권위와 능력의 중심지이시다. 그의 피조물인 우리는 조건이나 환경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요청을 거절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댈 수 없다. 주께서는 우리가 가는 길을 비추는 빛에 대해서 우리에게 책임을 지우신다. 극복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장애물들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진리에 순종하지 못할 핑계를 찾으려고 노력할지 모르나, 그는 심사를 견딜 수 있는 핑계를 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따를 수 없는 구원의 조건들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부과하셨다는 점에서 하나님께서 공의롭지 못하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될 것이다. 비종교적인 가정에 고용된 종들은 가이사의 집의 식구들과 비슷한 환경에 놓인 셈이 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동정을 금할 수 없는데, 만일 이 사람들이 종교적인 삶을 살려고 한다면 그들의 처지가 매우 큰 시련에 봉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매우 좋지 않은 실례들, 안식일을 범하거나 종교를 등한히 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들 앞에 나타날 것이다. 종교적인 특권은 허락되지 않고, 그들이 종교에 관심을 나타내면 고용주로부터 호의를 잃게 되고, 그들의 동료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싸워서 무엇인가를 쟁취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하늘을 위한 대표자가 되어야 한다.
그의 주변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요구를 등한히 하는 일에 대한 핑계를 대서는 안된다. 그가 가는 길에 어려움이 있더라고, 만일 그가 결정적으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우선적으로 구한다면 그의 길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은 힘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경주가 끝나기 전까지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시련들을 그의 상상으로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그가 하나님을 섬기기만 한다면 그리고 매일 그날그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일한다면, 도무지 넘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장애물들이 점점 사라질 것이며, 그가 두려워하던 모든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의 필요를 따라 채워질 것이다. 능력은 어려움을 만나고 그것을 극복해 낼 때마다 늘어나는 것이다. 히브리의 노예였던 다니엘은 왕궁의 총리로서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데 큰 장애물들을 만났었다. 그러나 그는 첫 업무를 시작할 때 어떤 반대가 생기더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그의 행동의 원칙으로 삼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교도인 왕의 궁정에서 날마다 당하는 작은 문제에 있어서도 견임 불발을 유지해 나갈 때, 그의 믿음, 용기 그리고 견고함이 날마다 증가하게 되었고, 하나님께 간청하는 일을 금지하는 왕의 조서가 전달되었을 때에도, 그 앞에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자굴에 들어가서라도 하나님의 원칙에 굳게 섰다.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은 어떻게든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기도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한 힘으로 덕을 취하고 악은 버리게 될 것이다. 그는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동안, 조소와 경멸에도 용감하게 맞설 것이다. 그분은 그를 대적하는 죄인들의 반대를 참아 내셨다. 그의 말씀이 진리이신 분이 도움과 은혜를 약속하셨다. 그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시는 일에 하나님을 결코 실패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이 처한 환경 때문에 그리스도의 종교를 등한히 한 핑계를 대려는 사람이 있는가?
사탄은 이런 장애물을 허용하는 사람들의 길에 어려움을 반복해서 설치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가이사의 집에 있던 제자들의 환경을 생각해 보라. 왕의 흉포한 행악과 궁중의 방탕을 생각해 보라. 이런 환경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섶을 지고 불속에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때의 그리스도인 회심자들이 이런 어려움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충실함을 지켜 나갔다면, 누구도 그들의 의무의 요구를 등한히 한 데 대해 변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제자들에 대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사실이 있다. 그들은 가이사의 집에서 진리로 회심했을 뿐 아니라 회심 후에도 계속해서 거기 남아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직분을 버릴 자유가 없었다. 그들이 진리를 발견했던 바로 거기에 머물면서 그들의 삶과 품성을 통해 변화시키는 능력을 증명해야 했다. 이 그리스도인들의 모본은 그들이 바울과 직접 소통하고, 그래서 그의 교훈과 격려에 크게 힘입었다는 사실에 큰 무게를 두고 있다. 여기서 배울 교훈은 신자들이 항상 어려움과 시련의 위치에서 물러서거나 유혹과 반대가 덜한 곳에 자신을 두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구주께서 하늘 궁정을 떠나 죄로 얼룩진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항상 마음에 기억하자. 구주께서는 자신의 모본으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분은 세상의 기만적 향락에 동참하고, 그 풍속에 좌우되고, 그 행습들을 따르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오셨다. 이러한 목적을 항상 염두에 두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물들지 않고 설 수 있다.
그의 지위나 환경이 어떠하든지 그는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참된 신앙의 능력을 나타낼 것이다. 자기 영혼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사람이 그럴만한 이유 없이 일부러 그 자신을 불리한 환경에 두거나, 종교적인 생활을 하는데 장애물이 있는 곳에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환경 가운데서 그가 진리를 받아들였다면,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 시키실 일이 없는지 부지런히 구해야 할 것이다. 불신자들 가운데 있는 한 이 한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마치 "가루 서 말속에 넣은 누룩"과 같아서 덩어리 전체가 부풀게 되도록 일할 것이다. 언행이 일치되는 그리스도인의 삼은 수많은 설교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의 위치가 어디이든지, 고귀하든지 비천하든지, 그 자리에서 직분을 충실히 이행하여 참된 종교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 그리스도인 품성이 계발되기에 가장 좋은 때는 유혹이나 시련이 없을 때가 아니다. 당해야 할 어려움이 없을 때,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타락하기에 가장 위험한 곳에 있는 것이다. 은혜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으시며, 또 시험당할 때에 피할 길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거절과 반대를 당할 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더욱 경성하고 전능하신 조력자께 더욱 열렬히 기도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견딘 혹독한 시련은 인내와 경계와 불요불굴의 정신과 하나님께 대한 깊고도 항구적인 신뢰심을 계발시킨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그들의 주인보다 더 호의를 받으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을 자기의 친구요 조력자로 둔 사람은 무관심과 폭행과 핍박의 냉기를 견뎌 낼 각오를 해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나눠 주시는 은혜를 통해 가장 극심한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지켜 나갈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모본을 회상해 보고, 고통과 핍박을 견뎌 내는 것이 그의 품성을 순결하게 하고, 마음을 겸손하게 하며, 예수를 더욱 신뢰하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나 강하게 되고, 복종하게 하지만 정복하고, 종일토록 죽임을 당하나 살고, 십자가를 지지만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 신앙의 승리이다.
저 자 : 엘렌 G. 화잇
출 판 : 시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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