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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업/교회증언 3.4.권

교회증언 3 권 // 교회증언 21호(1872) 잃어버린 자에 관한 비유들

by 동심초(남양주) 2022. 3. 6.

 교회증언  21호(1872) 잃어버린 자에 관한 비유들 

 슬로베니아에서 

 

 

   잃어버린 자에 관한 비유들   

 99   나는 잃은 양의 비유에 주목하게 되었다. 아흔아홉 마리는 광야에 남겨 놓고 방황하는 한 마리 양을 찾는 일이 이루어졌다. 잃은 양을 찾았을 때 목자는 그 양을 자기 어깨에 메고 기뻐하며 돌아왔다. 그는 자기에게 괴로움을 많이 안겨 주었다며 불쌍한 양에게 불평과 책망을 퍼붓는 대신 그 양을 짊어지고 기뻐하며 돌아왔다. 돌아온 후에는 기쁨을 한층 더 크게 표현했다. 발견한 주인과 기쁨을 나누기 위해 친구와 이웃들이 초청받았다.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눅 15:6). 찾았다는 사실이 기쁨의 주제였으며, 방황했던 것에 대해서는 마음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안전한 곳으로 데려오느라 겪은 고초와 위험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리라"(눅 15:7).

 

  잃은 은전  

잃은 은전의 비유는 과오를 범하고 방황하는 죄인을 상진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잃은 은전을 찾느라 여인이 기울인 신중함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바른길에서 벗어나 방황하고 과오를 범한 이들에 대한 의무에 관해 교훈을 배워야 한다. 그 여인은 자기가 가진 빛을 증진시키기 위해 등불을 켜고 방을 쓸며 은전을 발견하기까지 부지런히 찾았다. 하나님을 벗어나 방황하고 있기 때문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여기에 분명하게 규정되어 있다. 과오를 범하는 이들을 흑암과 오류 속에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그들을 ㅂㅊ 가운데로 다시 데려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등불을 켜야 한다. 흑암과 불신에 둘러싸여 있는 이들의 처지에 딱 들어맞는 하늘의 빛을 기도를 통해 진심으로 간구해야 하며, 명확한 진리의 요점들을 파악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의 논증은 물론 견책과 경고와 격려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잘못을 범하는 이들에게 접근해야 한다. 무관심이나 부주의한 태도는 하나님의 진노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100   여인은 은전을 찾았을 때 친구와 이웃들을 모두 부르며 말했다.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기쁨이 되느니라"(눅 15:9, 10), 과오를 범했지만 잘못을 깨닫고 고백하며 형제들과의 교제 가운데로 돌아온 이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 곧 여전히 과오를 범하며 날마다 하나님의 용서와 형제의 용서가 필요한 자들은 사탄의 계략에 미혹되어 그릇된 길로 행하며 고통 겪었던 형제자매가 돌아온 것이 대해 얼마나 더 크게 기뻐해야 하겠는가. 그릇 행하는 이들을 멀리하기보다는 그 형제들은 그들이 처해 있는 곳에서 그들을 만나야 한다. 흑암 가운데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의 결점을 찾는 대신에 그 형제들은 더욱 많은 신령한 은혜와 더욱 분명한 성경 지식을 받음으로 자신의 등잔에 불을 붙여야 한다. 이는 그 형제들이 가져가는 빛으로 말미암아 잘못 가운데 빠져 있는 이들의 흑암을 쫓아 버리기 위해서이다. 그 형제들이 성공을 거둬 잘못을 범한 이들이 과오를 깨닫고 빛을 따르기로 순복 한다면, 그들은 기쁨 가운데 받아들여져야 하며, 불평의 전신이나 그들의 엄청난 죄를 상기시켜 불필요한 노력과 염려와 힘든 일을 추가시키려는 노력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순결한 천사들이 기쁨으로 그 일을 반겼다면 그 형제들은 얼마나 더 크게 기뻐해야 하겠는가. 그들도 과오를 범했을 때 스스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흑암 가운데 있으면서 동정과 사랑과 도움을 필요로 했던 자들이 아닌가.

  탕 자   

 101   나는 탕자의 비유를 주목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재산 중에서 자기의 몫을 요구했다. 그는 자기 아버지와 이해고나계를 달리하기를 원했으며 그 몫을 자기 마음대로 관리하기를 원했다. 그의 아버지가 요청을 들어주자 아들은 이기적 이게도 아버지의 곁을 떠났는데, 이는 아버지의 권면이나 책망으로 괴로워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충고나 제재 없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 몫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상호 간의 의무 때문에 괴로워하고 싶지 않았다. 만일 그가 아버지의 재산을 받게 된다면 그의 아버지는 아들인 그에게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관대한 아버지에 대하여 어떠한 의무도 느끼지 않았으며, 아버지의 재산 중 일부가 자기에게 속했다는 생각으로 이기적이고 반역적인 정신을 강화시켰다. 그는 합법적으로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고 아무것도 받을 수 없을 때에 자기의 몫을 요구했던 것이다.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재물을 받게 되자 이기적인 마음을 가진 그는 아버지 곁에서 멀리 떠나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으려고 했다. 그는 제재를 멸시했으며, 자기의 선택에 따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쾌락을 추구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그가 악하고 방탕한 생활을 살며 아버지가 준 모든 것을 허비해 버렸을 때, 그 땅에 기근이 들어 그는 심히 궁핍하게 되었다. 그러자 죄로 가득 차고 허황된 쾌락의 길을 추구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궁핍해졌고 낭비해 버린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악하고 방탕한 생활로부터 돼지를 먹이는 비천한 생활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비천한 처지가 되고 나서야 그는 아버지의 친절과 사랑을 생각했다. 그제야 아버지의 필요성을 느꼈다. 친구 하나 없이 궁핍 가운데 빠지게 된 것은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불순종과 죄 때문에 그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분리되었다.

 

 102   그는 아버지의 집을 나온 자기는 굶어 죽어 가고 있는 반면에, 자기 아버지 집에 고용된 종들은 특권과 풍족함을 값없이 누리고 있다는 점을 생각했다. 역경을 통해 겸비하게 된 그는 겸손히 참회하며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편안하고 버젓한 옷조차 없는 거지였다. 궁핍으로 비참하게 되었으며 굶주림으로 야위어졌다. 아들이 집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걸어오고 있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방랑자를 보자 제어할 줄 모르는 죄의 길을 따라 여러 해 전에 떠난 탕자를 가장 먼저 떠올렸다. 부정(父情)이 격동되었다. 속속들이 비참해진 모습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그 아들의 모습을 식별했다. 그는 아들이 자기 앞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그를 맞으러 달려 나갔다. 아버지는 아들을 꾸짖지 않고, 오히려 죄악의 길을 추구하여 고통을 자초한 아들을 아주 측은히 여겨 서둘러 살아과 용서의 표시를 그에게 주었다. 비록 병들어 수척해졌고, 안색에는 살면서 허비한 방탕한 생활의 흔적이 역력했으며, 누더기 옷을 걸쳤고, 맨발은 여정 길의 먼지로 더럽혀져 있었지만, 아들이 자기 앞에 겸손히 꿇어 엎드리자 아버지에게는 민감한 동정심이 크게 일어났다. 아버지는 체면 차리느라 뒤로 물러서지 않았으며 가혹하게 대하지도 않았다. 그는 아들에게 과거의 과오와 죄의 길을 지적하며 얼마나 비천하게 되었는지를 상기시키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그는 거역했던 아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그의 헐벗은 몸에 자기의 좋은 옷을 입혀 주었다. 아버지는 따뜻한 마음으로 아들을 맞아들이고 동정심을 보였는데, 이는 아들이 아버지의 선함과 사랑을 의심한 이상, 더 이상 그렇게 하기 힘든 대접이었다. 만일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했을 때 죄책감을 가졌다면, 그가 이런 영접을 받았을 때 자기의 그릇된 길에 대하여 더욱 깊이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마음이 이전에는 굴복했다면 이제는 아버지의 사랑을 저버렸다는 자각 때문에 깨어져 버렸다.

 

 103   부자의 연이 끊길가봐 두려워 통회하며 벌벌 떨고 있던 아들은 이와 같은 대접에 비해 미처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대접받을 자격이 없음을 알았고 아버지를 떠난 죄에 대하여 시인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었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눅 15:21). 그는 자기를 단지 고용된 종으로 여겨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기 종들에게 특별한 존경의 표시를 하도록 했고, 마치 그가 언제나 순종하는 아들이었던 것처럼 그에게 옷을 입히도록 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온 것을 특별한 경사로 만들었다. 밖에서 돌아온 큰아들은 동생이 돌아온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모두가 기뻐하는 소리를 듣게 되자 일꾼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우가 돌아왔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얻은 것처럼 아버지가 그를 받아들여 살찐 송아지를 잡았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러자 형은 화가 난 나머지 안에 들어가 아우를 보거나 영접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떠나면서 둘이 나눠졌어야 할 의무를 모두 자기에게 떠맡긴 불충실한 동생이 그토록 존귀하게 영접받는 것에 대해 적개심이 끓어올랐다. 동생이 사악하고 방탕한 길을 추구하며 아버지가 준 재산을 탕진하여 궁핍하게 되는 동안, 형은 집에서 다들로서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 그런데 이 방탕한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자 자기가 받았던 그 어떤 대접 이상으로 존경과 명예를 받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장남에게 안에 들어가 아우를 기쁨으로 영접하라고 부탁했다. 이는 그가 잃었다가 찾은 바 되었고, 죄와 사악함 가운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양심을 회복하고 죄악의 길을 혐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남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29, 30).

 

 104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것"(눅 15:31)이라는 확신을 주면서 기쁨을 표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일었다가 얻었기"(눅 15:32) 때문이었다. 잃은 자를 찾고 죽은 자가 다시 살게 되었다는 사실은 아버지에게 그 어떤 일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다. 이 비유는 과오를 범한 뒤 회개한 자를 영접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 아버지는 자기에게 죄지은 아들을 동정하는 가운데 넘치는 연민과 용서의 마음으로 탕자를 만났고, 자식으로서의 정에 무감각하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자기의 큰 죄와 태만을 깨닫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와 그 사랑과 권리를 인정 하자 크게 기뻐했다. 아버지는 한때 죄악의 길을 추구했으나 이제는 회개한 아들에게 자기의 동정과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아들은 고생 끝에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깨닫고, 이 커다란 필요를 유일하게 채워 줄 수 있는 분인 아버지에게로 돌아왔다. 탕자가 돌아온 것은 크나큰 기쁨의 원천이었다. 그 형의 불평은 당연한 것 같지만 올바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형제가 다른 형제를 향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흔하다. 잘못을 범한 자들에게 그들이 어디에서 잘못했는지 깨닫게 해 주며, 그들의 실수를 계속 상기시켜 주고자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과오를 범한 자에게는 연민과 도움과 동정이 필요하다. 그들은 정서적인 고통을 겪으며 자주 낙망과 좌절 가운데 빠진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값없이 주어지는 용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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