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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리/바울의 생애

바울의 생애 // 9. 베뢰아와 아덴의 바울

by 동심초(남양주) 2022. 4. 7.

 9. 베뢰아와 아덴의 바울 

 함백산에서 

 

 

  뵈뢰아와 아덴의 바울  

베뢰아에서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는 일로 그의 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행 17:11~12. 복음 진리가 선포되는 곳은 어디나 정직하고 바르게 살고자 갈망하는 사람들이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하게 된다. 이렇게 할 때, 베뢰아서 수고하던 사도들에게 일어났던 일과 비슷한 결과가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진리를 전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와 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다. 비록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을 논박할 수 없으면서도, 그들은 제시된 증거를 연구하는 것을 극도로 주저한다. 어떤 이들은 이 교리들이 참으로 진리라고 믿지만, 그것이 저희가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한다고 해서 결과적으로는 병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지금껏 지켜 온 오래된 신앙이나 습관이 그들에게 충분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세상에 전할 기별을 주어 대사를 보내신 주께서는 그의 종들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따라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분명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들에게 제시된 빛에 따라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것을 베뢰아 사람들처럼 연구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이다. 주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을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베뢰아 사람들의 마음은 편견으로 좁아지지 않아서, 사도들이 그들에게 전해 준 진리를 기꺼이 연구하고 받아들였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신사적인 베뢰아 사람들을 따라서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고 그리고 그들에게 전해진 기별을 기록된 말씀과 비교한다면 오늘날 하나님의 율법에 충실한 신자가 한 명 있는 곳에 수천 명의 신자들이 있게 될 것이다. 오류는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한다. 그러나 진리는 마음에 빛을 주고 영혼에 생명을 준다. 데살로니가의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사도들에 대한 질투와 분노가 가득하여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위해 일하지 못하도록 추방시킨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베뢰아까지 그들을 따라와 쉽게 흥분하는 하류 계급의 사람들을 자극하여 사도들을 대적하도록 했다. 진리의 교사들은 다시 한번 그들의 일터에서 쫓겨났다. 이와 같이 이 성읍, 저 성읍에서 진리의 교사들이 핍박을 당했다. 바울이 이처럼 베뢰아에서 급히 떠났으므로 그는 그가 바랐던 데살로니가 형제들을 방문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복음 사업의 발전을 막을 수는 없었으나. 사도들의 사업을 극도로 어렵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섭리 가운데 사탄에게 허락하셔서 바울이 데살로니가로 돌아가는 것을 막으셨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사도는 반대와 투쟁 그리고 박해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게 그의 길을 재촉했다. 이는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보여 주신 계시에 나타난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 보내노라." 베뢰아에서 떠난 바울은 아덴으로 향했다. 그는 아덴에 갈 때 새로 믿음에 들어온 베뢰아 사람 몇을 데리고 갔다. 그들은 사도에게서 생명의 도에 대해 더 배우고자 갈망하고 있었다. 아덴에 도착하자마자, 바울은 베뢰아 형제들에게 돌아가서 실라와 디모데를 속히 그 도시로 보내라고 부했다.

 

디모데는 바울이 떠나기 직전에 베뢰아에 왔으며, 실라와 함께 그곳에 남아서 훌륭하게 착수된 그 사업을 수행하였고, 새로운 회심자들을 거룩한 신앙의 원칙으로 가르쳤다. 아덴이라는 도시는 이교국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바울은 루스드라에서와 같이 무지하고 잘 속는 민중이 아니라 지성과 교양이 매우 뛰어난 백성들을 만났다. 도처에 있는 그들 시의 형상과 신격화된 역사와 시(詩)에 있어서 영웅들의 조상(彫像)이 어느 방향에 서나 시선을 끌었고, 장엄한 건축물과 그림들은 민족의 영광과 널리 성행하던 이교 신의 숭배를 나타내고 있었다. 백성들의 감각은 그 예술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으로 황홀해져 있었다. 사방에서 막대한 비용을 들인 사원들과 신전들이 크고 육중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전쟁의 승리와 기념할 만한 인물들의 행위가 조각물, 사당 그리고 명판에 새겨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아덴을 거대한 예술의 정당으로 만들었다. 바울이 자신의 주위를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보고, 또한 도시 전체가 우상 숭배에 빠진 것을 보았을 때,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이 수치를 당하시는 것을 알고서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위한 질투심으로 분기되었다. 그의 마음에는 이 거대한 도시의 시민들이 그들의 지적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우상 숭배에 빠진 것을 보고 동정을 금할 수 없었다. 사도는 그의 눈이 머무는 곳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에 미혹되지 않았다. 이 위대한 학문의 중심지에서 그가 마주친 물질적 지혜와 철학에 대해서도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인간의 예술이란 그들의 악덕을 신성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것이며, 하나님을 부인하는 일에 일생을 바친 지도자들에 대한 기억을 영화롭게 해서 거짓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사도들의 영성은 그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결코 사라지지 않는 풍성한 기쁨과 영광인 하늘의 사물의 매력에 생생히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위에 장엄함과 화려함은 그의 눈에 아무 가치가 없게 보였다.

 

값비싼 장치들과 도시의 장엄함을 보았을 때, 그는 예술과 과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힘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마음은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아덴의 사업의 중요성을 생각하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하나님의 예배하지 않는 이 큰 도시에서 바울은 고독감에 억눌렸다. 그래서 그의 역자들의 동정과 조력을 갈망했다. 인간적인 우정에 있어서 바울은 몹시 외로웠다. 데살로니가 인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그는 "우리만 아덴에 머물"(살전 3:1)러 있다는 말로 그의 감정을 표현했다. 바울의 주요한 사업은 하나님 그리고 타락한 인류를 위한 그분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별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는 관광을 하러 다니는 것이 아니었으며, 새롭고 신기한 경치를 보고 싶은 병적 욕구를 채우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곧 가장 교활하고 유혹적인 형태의 이교 신앙과 대면해야 했다. 넘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장애물들이 그의 목전에 나타나 백성들의 마음에 접근하려던 그의 시도는 거의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주변 어디서나 눈에 띄는 우상들에 슬픔을 느끼면서 그는 주의 사업에 대한 거룩한 열정을 느꼈다. 그의 유대인 형제들을 찾아 아덴에 있는 그들의 회당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설교했다. 그러나 바울이 그 도시에서 해야 할 주요한 사업은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다. 이곳 아덴 사람들의 종교는 그들은 매우 뻐기고 있지만 무가치한 것이었다.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결핍되어 있었다. 그 종교의 대부분은 사실 예술품 숭배나 환락과 축제로 돌아가면서 돈을 낭비하고 있었다. 참된 선의 미덕이 필요했다. 참된 종교는 자신을 극복하는 일인데도, 그저 지성과 미각의 종교는 그 소유자에게 그의 본성인 악을 뛰어넘고 하나님과 자신을 연결시킬 수 있는 필수적 본질이 결핍되어 있다.

 

이 도시의 비석들에는 바로 이 큰 결핍이 그대로 기록되어 드러나고 있었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 그렇다. 아무리 그들 자신의 지혜와 부요, 예술과 과학에 대한 재주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할지라도, 아덴의 학자들은 위대한 우주의 통치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도시의 위인들은 토론거리를 찾는 데만 굶주려 있었다. 그 일에서만 그들은 자신의 지식과 말재주를 보야 줄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는 동안, 바울은 게으르게 보내지 않았다. 그는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 하"였다. 아덴의 대단한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백성들 앞에 새롭고 이상한 교리를 제시하는 남다른 교사가 저희 도시에 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람들  중에 자신들의 지적 문화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는 어떤 이들이 바울을 찾아와 그와 더불어 논쟁을 시작했다. 곧 청중들의 무리가 그들 주위에 모여들었다. 어떤 이들은 그 사도를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 그들보다 아주 못한 사람이라고 조롱할 준비를 하고서 저희들끼리 조롱하는 말로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라고 했다. 다른 이들은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을) 전"한 까닭에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 보다"라고 말했다. 바울과 만난 사람들 중에는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익 철학자들도 있었으나, 그들도 그와 접촉한 다른 모든 사람처럼 곧 바울이 자기들보다 더 큰 지식의 창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지성적 능력은 그보다 더 높은 학문을 쌓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한편 그의 열렬하고 논리적인 이론과 힘 있는 웅변은 모든 청중의 주목을 끌었다. 이와 같이 사도는 담대히 서서 그들의 땅에서, 그의 반대자들을 대항해서, 논리에는 논리로, 철학에는 철학으로, 웅변에는 웅변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이방 신들을 전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소크라테스의 운명에 그의 주목을 끌게 했고, 그들도 같은 길을 따라 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지 말라고 바울에게 충고했다. 그러나 사도의 담화는 백성들의 주목을 끌었고, 그의 꾸밈없는 지혜는 그들의 존경과 경탄을 받았다. 철학자들은 학문이나 풍자로 바울을 침묵시킬 수가 없었다. 또한 바울이 만사를 내걸고 자기의 사명을 성취시키며 복음을 전할 결심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말을 공평하게 들어주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 언덕으로 인도했다. 이곳은 오 아덴에서 가잔 신성한 곳이었으므로, 그곳을 회상하고 연상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이들의 심중에 공포심을 일으켜 미신적인 경외심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보게 했다. 민사 문제와 마찬가지로 더욱 중요한 모든 도덕적인 문제에 있어서 최종적인 재판관으로서 일한 사람들이 종종 종교와 연관된 문제들을 주의 깊이 설파한 곳도 이곳이었다. 재판관들은 바위에 파놓은 노천 좌석에 앉았다. 강단은 골짜기 바닥에서 돌 던질 만큼 높이의 계단 높이에 설치되어 있었다. 머지않은 곳에 신전들이 있었고, 성소들과 신상들, 도시의 계단들이 한눈에 보였다. 군중이 운집한 대로의 소음과 혼잡 그리고 시끄러운 토론의 소동에서 떨어진 이곳에서 사도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그 도시의 천박하고 생각 없는 계층의 사람들에게 가장 존중히 여겨지는 곳으로 사도를 따라가는 것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그의 주위에는 시인들과 화가들과 철학자들, 곧 아덴의 학자와 성자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그에게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행 17:19~20)라고 물었다.

 

이 엄숙한 책임의 시간에 사도는 평온하고 침착했다. 그는 거룩한 보증을 의지하여 이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지 이 시간은 네게 주었다." 그의 마음은 중대한 기별로 무거웠고, 따라서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그가 한가한 말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청중들에게 확신시켰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행 17:22~23). 그들은 모든 지력과 총체적인 지식을 가지고도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더욱 큰 빛을 갈망하고 있는 어떤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한하신 분을 향하여 다가가고자 하고 있었다. 바울은 우상이 가득 찬 신전을 향하여 손을 펼치고는, 가장 인상적인 방법으로 그의 심령의 부담을 토로하면서, 아덴 사람들의 종교상 오류를 폭로했다. 그의 청중 가운데 가장 슬기로운 사람들 작품, 문학 그리고 종교에 정통하다는 것을 나타냈다. 그들의 조상(彫像)과 우상들을 가리키면서 하나님은 인간이 고안한 형상과 같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 예술 작품들은 아주 희미하게조차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었다. 그 우상들은 아무 호흡도 없고 생명도 없어서, 인간의 힘에 지배되어 사람의 손이 그것을 움직일 때에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경배하는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그 우상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인간의 고상한 표본이신 그분에 대해 이렇게 외쳤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4~25).

 

사람은 바로 이 무한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지적 능력과 완전하면서도 좌우 대칭적인 존재로 축복을 받았다. 하늘이라도 하나님이 계실 만큼 넉넉지 않은데 인간의 손으로 지은 신전들이야 얼마나 보잘것없겠는가. 바울은 그의 주제(主題)의 영감에 따라 우상 숭배자들인 청중들의 이해의 한계를 높이고, 거짓 종교의 한계를 넘어서 저희가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부른 그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견해를 갖도록 이끌어 주었다. 바울이 지금 그들에게 선포한 그 존재는 사람에게서 독립하여 계시고, 능력과 영광을 더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는 분이셨다. 백성들은 바울의 웅변을 듣고 경탄하여 넋을 잃었다. 에피 큐리오 학자들은 좀 더 큰 소리로 자유롭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들의 입장을 더 강화시켰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모든 것은 우연한 기회 속에서라도 기원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확실한 통치력이 우주를 다스리고 있다고 믿었다. 이 거룩한 통치자는 세상의 어두운 시대에도 이교도의 우상 숭배를 묵과하셨으나, 이제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보내셨으므로, 가난하고 비천한 출신뿐 아니라 거만한 철학자와 지상의 군주들도 모두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기를 기대하셨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31). 바울이 죽은 사람의 부활을 말하자,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의 말을 제쳐 두고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고도했다. 다"고도했다. 이리하고 이교 학문의 중심지 아덴에서 사도의 수고는 끝났는데, 이는 아덴 사람들이 우상 숭배에 완고하게 매달려 참된 신앙의 빛에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전적으로 자신의 업적에 만족하고 있을 때에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거의 없다. 학문과 고상함을 자랑하는 아덴 사람들은 계속적으로 더욱 부패하게 되었고 헛된 우상 숭배의 신비들에 더욱 만족하고 있었다. 바울의 말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제시된 진리를 저희 마음에 확신 한 사람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구속의 경륜을 받아들일 만큼 자신을 낮추려고 하지 않았다. 웅변적인 말로도, 힘 있는 논증으로도, 죄인을 회심시킬 수는 없다. 오직 성령과 하나님의 능력만이 마음에 진리를 적용시킬 수 있다. 아덴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복음 기별이 아덴 사람들 중에서 비교적 성공을 얻지 못한 이유를 지성과 인간의 지혜를 자랑하는 그들의 교만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구주께서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관심이 있는 것들을 지혜 있고 신중한 자들에게 숨기시고, 지식에 있어서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가련하고 잃어버린 죄인으로서 그리스도께 나오는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구원이 이르는 지혜를 얻게 될 것이나, 자신들의 지혜를 높이며 나오는 특출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만이 주실 수 있는 빛과 지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아덴에서의 그의 수고가 전혀 헛된 것은 아니었다. 가장 저명한 시민의 한 사람인 디오누시오와 어떤 다른 사람들이 복음 기별을 받아들이고 신자들과 전적으로 연합했다. 영감의 붓으로 기록된 사도의 말과 그의 태도와 그가 처했던 환경에 대한 묘사는 앞으로 사도의 말과 그의 태도와 그가 처했던 환경에 대한 묘사는 앞으로 오는 모든 세대에 전달되어 고독과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확신과 용기 그리고 그가 이교의 심장부에서 기독교를 위하여 얻은 승리를 증거 하게 될 것이다.

 

아덴 사람들의 생활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영감을 얻게 된다. 그들의 모든 지식과 세련됨, 예술, 그러면서도 악덕에 침몰되었으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통해 어떻게 그들의 우상 숭배와 교만의 죄와 자만하는 백성들을 책망하셨는지를 볼 수 있다. 바울의 말들은 당시에 상황과 함께 기억되고, 교회에 보화 같은 지식을 준다. 그는 그의 교만을 청중을 자극할 수 있고 그 때문에 자신이 어려움에 처할 수 있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의 연설이 직접적으로 그들의 신들이나 자기 앞에 앉아 있는 도시의 위인들을 공격했다면, 그도 소크라테스가 당한 운명에 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마음을 이교의 신들로부터 조심스럽게 이끌어 그들에게 참되신 하나님을 소개했는데, 그분이야말로 그들이 그토록 경배하려고 애를 썼으면서도 공개적으로 비문에 새긴 거처럼 알지 못하는 신이었다.

 

저   자 : 엘렌 G. 화잇

출   판 : 시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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