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가이사랴에서의 재판
제주도에서
가이사랴에서의 재판
바울이 가이사랴에 도착한 지 닷새 후에 그의 고소인들은 변호사로 고용한 더둘로와 함께 예루살렘으로부터 왔다. 그 소송은 신속히 심리(審理)하도록 허락되었다. 바울은 회중 앞으로 끌려 나왔고, 더둘로는 송사하기 시작했다. 로마 총독에게는 사실과 정의에 대한 단순한 진술보다 아첨이 더욱 효과적인 것이라고 판단한 교활한 변사는 벨릭스를 칭찬하는 말로 그의 연설을 시작했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행 24:3). 더둘로는 여기서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것은 벨릭스의 성품이 천하고 경멸할 만했기 때문이었다. 벨렉스는 "각종 색욕과 잔인한 행위를 행함에 있어서 노예의 기질을 가지고 왕권을 행사하였다"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가 국가를 위해서 일한 것도 사실이다. 그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강도를 막고,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바울을 그로 오인해서 서둘러 잘못 체포했던 그 애굽의 반역자를 몰아낸 일로 공을 세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의 잔인성과 압박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었다. 그의 믿기 어려운 잔인성을 그의 지위를 얻는 데 크게 신세를 진 대제사장 요나단을 살해하는 데서 드러났다. 요나단은 벨릭스보다 별로 나은 것이 없었지만, 요나단이 그의 행위 중 일부를 폭로하려는 모험을 감행하자, 이것 때문에 행정관은 요나단이 성전의 공식 업무를 수행하는 중에 그를 암살해 버렸다. 막돼먹은 방탕의 견본이라 할 수 있는 얼룩진 그의 성격이 더둘로와의 결연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 일로 극치에 달하고 있다. 구브로의 마법사 시몬 마구스의 사기술을 통해서 벨릭스는 공주가 남편을 버리고 자기의 아내가 되게 했다. 드루스 실라는 젊고 매력적인 데다가 유대인이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헌신적으로 밀착되어 있었는데 남편은 그녀를 소유하기 위해 큰 희생을 치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가장 맹렬한 편견을 앞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잔인한 데다 나이 든 사람과 음탕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 자기 민족으로부터 혐오를 자초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릭스는 사탄의 도구인 마법사와 배신자가 일을 처리하게 함으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였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심사하면서 벨릭스에 대한 막연한 감정을 함께 가졌다. 바울에 대한 정죄를 확보하기 위해서 그의 호의를 얻어 내려는 욕망이 너무 컸기 때문에, 더둘로의 아첨하는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의 아첨하는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나, 바울에 대하여 정죄를 얻어 내고자 하는 그들의 갈망은 진리에 대한 애착심보다 더 강했다. 거룩한 직분을 맡은 이 사람들은 성직자의 옷을 입고, 관습과 의식법을 준수하는 데 매우 엄격했으며, 외적인 오점을 꼼꼼하게 피하면서도, 그들의 영적 성전은 온갖 죄악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무엇이든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과의 외부적 접촉은 그들의 눈에 큰 범죄로 여기는 한편, 바울을 죽이는 일은 정당한 일로 여기고 있었다. 인간의 마음에 일어날 수 있는 얼마나 기막힌 맹목적 실례인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화려한 옷은 입었지만 거룩함의 열매는 없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딤후 3:5)들이다. 순결하고 선한 사람에 대한 악의로 가득 차, 그의 목숨을 빼앗을 온갖 궁리를 다하면서, 악질적인 방탕을 찬양하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비슷한 성격을 소유하고 있다. 모든 의의 적으로부터 충동을 받아 앗을 선이라고 하고 진리를 거짓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가 말한 대로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들어가지 못하는도다"(사 59:14)라는 말씀의 모습이다. 이것이 세상의 형편이요 정신이다. 세상과 섞인 사람들은 사물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속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고후 6:14~15)하겠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분이 보시는 것처럼 본다. 순결하고 선한 것은 선한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더둘로는 바울을 위험한 사람으로,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유대인 사이에 선동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황제에 대해 반역했다고 죄를 씌워 고발했다. 그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하면서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당의 지도자이며, 모세의 법에 대해 이단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가 성전에 대해 모독을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것은 단지 유대의 법뿐 아니라 로마의 법도 어긴 것이라고 따졌는데, 이는 로마의 법이 그들의 종교적 예배를 보호하기 때문에 유대인을 보호하고 있다고 강변했다. 그리고 더둘로는 예루살렘 수비대의 사령관 루시아가 유대인들이 바울을 그들의 종교법으로 재판하려 할 때, 그를 난폭하게 빼앗아 갔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이 문제를 벨릭스 앞에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했다. 이런 거짓 진술은 총독을 꾀어 바울을 유대인의 법정에 넘겨주도록 하려는 계획으로 매우 치밀하게 고안된 것이었다. 모든 비난은 참석한 유대인들에게 맹렬한 지지를 받았고, 그들은 죄수에 대한 증오심을 감추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벨릭스는 바울을 고소하는 자들의 성향과 성격을 충분히 간파할 수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알랑거리는 동기도 파악할 수 있었고 그들의 고소 내용을 입증하는 일도 실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피고를 향하여 자신을 위해 변명해 보라고 요청했다. 바울은 그를 위한 찬사로 말을 낭비하지 않았고, 단순한 말로 벨릭스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말하는 것이 기쁜 일이라고 진술했다. 왜냐하면 벨릭스는 오랫동안 변호사의 경험이 있어서 유대인의 범과 관습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씩 차례로 자신에 대한 고소 내용을 논박해 나갔다. 그는 예루살렘 어느 곳에서도 소동을 일으킨 일이 없으며, 성전을 모독한 일도 없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 또는 시중에서 무리를 소동하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제 나를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들이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행 24:12~13).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그는 조상들의 하나님을 경배했다는 사실을 고발하는 한편, 자기는 항상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었고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대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생활의 주요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 없이 없기를 힘썼"다고 말했다. 바울은 솔직하고 간직하게 그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목적과 체포되어 심문당하게 된 전후 사정을 진술했다.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그들이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만일 나를 반대할 사건이 있으면 마땅히 당신 앞에 와서 고발하였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들이 내가 공회 앞에 섰을 때에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는가 말하라 하소서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 이다"(행 24:17~21)라고 말했다. 사도는 열성 있고 매우 성실하게 말했으며, 그의 말에는 그들을 크게 설득시키는 힘이 있었다. 더구나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벨릭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의 행동에 관하여 똑같은 증언을 첨부했다. 또한 벨릭스는 가이사랴에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해서 상당 시산 익숙히 알고 있었으며,
유대인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그 종교에 대해서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이설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바울의 말은 그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일으켰다. 그는 이제 유대인들의 동기를 더욱 분명히 알게 해 주었다. 총독은 로마 시민을 부당하게 정죄하여 그들을 만족시키려고 하지 않았고, 그를 공정한 심판도 거치지 않고 사형에 처하도록 그들에게 내어 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벨릭스는 사리사욕 외에 더 고상한 동기 따위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칭찬에 대한 애착심과 승진에 대한 욕망이 매우 강했다. 그는 유대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가 무죄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제대로 공의를 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루시아가 나타날 때까지 심문을 연기하기로 결정하고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행 24:22)고 말했다. 바울은 다시 백 부장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으나, 그의 명령에 따라 재판 이전에 훨씬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는 엄격하게 감시를 받아야 했지만, 유대인의 음모로부터 보호되고 또한 아직도 죄수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이 그를 면회하거나 그의 편리를 위해서 시중들도록 하는 일을 허락받았다. 벨릭스는 바울을 지키도록 한 백 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행 24:23)고 하였다. 그 일 후 오래지 않아 벨릭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는 그의 남편에게서 불러 개인적인 면담을 하게 되었다. 드루실라는 그의 남편에게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사도에게 깊은 흥미를 느끼고,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믿음의 이유를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바울은 이렇게 주를 위해서 갇힌 자로서 달리는 접촉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잔인하고 방탕한 로마의 총독과 방탕한 유대인 여자가 그의 청중이 되었다. 그들은 이전에 한 번도 듣지 못할 수도 있었으며, 만일 거절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날에 그들에 대해 불리한 증언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로 여기고, 그 기회를 최대한 이용했다. 그는 앞에 있는 남녀가 자신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칭찬이나 아첨을 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의 말이 그들에게 생명이나 사망의 냄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모든 이기적 생각을 버리고 그들의 위기에 대한 깨달음을 주고자 하였다. 복음 기별은 어중간한 입장을 용납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진리와 함께 서든지 아니면 거절하든지 선택해야 하며, 만일 받아들이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복음의 원수가 될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신분 또는 조건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 은혜로운 초청의 필요를 마음에 느끼는 모든 인류에게 전해진다. 예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고 하셨다. 사도는 복음이 그의 말을 듣게 될 사람들 누구에게나 장차 크고도 흰 보좌 주위에 둘러 있는 순결하고 거룩한 무리 가운데 들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가"고 말씀하실 자들 중에 설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하늘의 심판대 앞에서 그의 청중들 각 사람과 마주쳐야 하며, 거기서 그가 말하고 행한 모든 것뿐 아니라 그가 행한 말과 행위가 동기와 정신까지도 밝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벨릭스의 행동이 매우 난폭하고 잔인했기 때문에, 감히 이전에 그의 성품과 행동에 흠이 있다고 암시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그의 대한 이유를 분명히 선포하고, 그리스도인 품성의 본질인 미덕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의 앞에 있는 교만한 부부에게는 이러한 미덕이 전혀 없었다. 그는 그의 청중에게 하나님과 성품과 그의 의, 정의 공평, 그리고 그의 율법과 성질과 의무에 대해서도 전했다. 그는 하나님을 율법에 따라 정욕을 이성의 지배 아래 두어, 체력과 지력을 건강한 상태로 보존하는 절제 생활이 인간의 의무라는 사실도 분명히 언급했다. 분명히 심판의 날이 올 텐데, 그때에도 모든 사람이 몸으로 행한 행위에 따라 보상을 받겠고, 부나 직분이나 지위가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하거나 죄의 결과에서 그를 구원하는 데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도 밝혔다. 인생은 인간이 내세를 위하여 준비하는 기간이라는 것도 설명해 주었다, 인간이 현재의 특권과 기회를 소홀이 한다면 영원한 손실을 당하게 될 것이며, 인간에게 새로운 유예 기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전했다. 바울은 특별히 하나님의 율법의 원대한 요구를 강조했다. 이것이 어떻게 인간의 도덕성의 깊은 비밀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견해와 지식으로부터 숨겨진 것을 환하게 밝혀 주는 지도 보여 주었다. 손이 행하는 것과 혀가 말하는 것, 곧 외적 생애가 나타내는 것은 인간의 도덕성을 제대로 보야 줄 수 없다. 율법은 인간의 사상과 동기와 목적을 드러낸다. 사람들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은밀히 숨겨둔 정욕, 질투, 증오, 야망, 마음이 은밀한 곳에서 꾀하는 악한 행위들은 비록 기회가 없어서 실행하지는 못할지라고, 하나님의 율법은 이 모든 것을 행동에 옮긴 것처럼 정죄한다. 사람들은 이런 은밀한 죄를 안전하게 지을 수 있다고 상상하지만 바로 이것들이 품성의 기초를 파괴하는데, 그 이유는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죄를 위한 큰 희생을 치르신 분께 향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장차 올 좋은 것들의 그림자인 희생 제물들을 지적했고, 그 후에 이 모든 의식의 원형, 즉 타락한 인류를 위한 유일한 생명과 소망의 근원으로서 희생 제물들이 지적하는 분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제시했다. 옛 성인들도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신앙으로 구원을 받았다. 희생 제물들의 죽어 가는 고통을 볼 때, 그들은 세상 죄를 지고 가셔야 할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분의 모든 피조물의 사랑과 순종을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율법을 통해서 그들에게 의의 완전한 표준을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창조주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자신들의 길을 따르기로 선택했다. 그들은 하늘처럼 높고 우주처럼 넓은 사랑에 증오로 보답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수준에 맞도록 당신의 율법의 요구를 낮추실 수도 없고, 인간이 자력으로 율법의 요구를 응할 수도 없다. 다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죄인은 악에서 깨끗하게 될 수 있고, 창조주의 율법에 순종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구속력이 있는 요구를 경감시키도록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취하도록 요구하신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시 85:10). 이와 같이 죄수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요청했고, 멸시받으신 나사렛 사람 예수를 세계의 구속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유대인인 왕후가 자기가 그토록 수치스럽게 범한 그 율법의 거룩한 특성을 잘 이해하였으나, 갈보리의 사람에 대한 그의 편견은 생명의 말씀에 대하여 마음을 완고하게 했다. 그러나 벨릭스는 이 진리에 대하여 전이 들어 본 일이 전혀 없었으며,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의 마음에 죄를 깨닫게
하실 때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제 양심이 살아나 그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는 바울의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느꼈다. 죄를 범한 과거가 회상되었다. 두려울 정도로 분명하게 그의 앞에 방탕하던 초기 생애의 비밀과 피 흘림 그리고 그의 후년에 검은 기록이 떠올랐다. 음탕하고 잔인하고 욕심 많고 불의하고 사적인 살인과 공적인 학살로 물들어 있었다. 이처럼 진리가 그의 마음에 절실히 다가온 적이 전에는 결코 없었다. 그리고 그의 심령이 그처럼 공포로 가득 찼던 적이 전에는 결코 없었다. 그의 범죄의 생애의 모든 비밀이 하나님의 목전에 공개되었고, 자신의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두려워 떨었다. 그러나 죄에 대한 깨달음이 그를 회개하도록 하는 대신 그는 이 반갑지 않은 환상들을 흩어 버리려고 노력했다. 바울과의 회견은 중단되었다. 그는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행 24:25)고 말했다. 벨릭스의 태도와 빌립보의 간수의 태도는 얼마나 현저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가! 주의 종들은 벨릭스에게 온 것처럼 결박을 당한 채로 간수에게 왔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 증거, 곧 고통과 치욕 중에서도 기뻐하고 지진으로 땅이 비틀거릴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와 같은 용서의 정신으로 간수의 마음에 죄를 깨닫게 했기 때문에 그는 떨면서 그의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받았다. 벨릭스도 떨었으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다. 간수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그의 마음과 가정에 받아들였다. 벨릭스는 하나님의 성령을 떠나가게 하였으나, 간수는 하나님의 자녀와 하늘의 후사가 되기로 선택했다. 하나는 불의의 일꾼들과 운명을 같이했으나,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고 하늘의 후사가 되기로 선택했다.
이 년 동안이나 심문이 실시되지 않은 채 바울은 죄수로 남아 있었다. 벨렉스는 여러 번 그를 방문하여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다정한 척한 것은 진정한 목적이 이득을 얻으려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어서, 돈을 지불하면 바울이 풀려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도는 뇌물을 주고 풀려나기에는 너무도 고상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바울은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고, 몸을 굽혀 악을 행하려고 해 본 적도 없었다. 더군다나 그와 같은 보석금을 지불하기에는 너무나 가난했고, 비록 그렇게 할 생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자기 지신을 위하여 그가 회개시킨 사람들의 동정과 너그러움에 호소할 마음이 없었다. 또한 그가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 기간이 끝나 갈 무렵, 가이사랴의 백성들 사이에서 두려운 투쟁이 일어났다. 그 도시 안에서 유대인과 헬라인들 사이에 각각의 권리와 특권에 관한 문제로 자주 분쟁이 있어 왔는데, 이것이 아예 불화로 정착되었다. 가이사랴의 모든 화려한 신전, 궁전, 원형극장, 이 모든 것이 첫째로 헤롯의 야망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심지어는 가이사랴의 모든 번영과 중요성이 비롯되었던 항구도 그가 엄청난 돈과 노력을 들여 건설한 것이었다. 유대인 거주자들은 숫자도 엄청났고 부요하기도 했다. 그들은 그 도시가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들의 왕이 그 대부분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헬라인들도 마찬가지로 집요하게 그들의 우선권을 주장했다. 그 두 해의 끝 무렵에 두 그룹 사이에 불화가 원인이 되어 치열한 싸움이 시장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 결과는 헬라인들의 패배로 끝이 났다. 벨릭스는 이방인 편이었는데, 군대를 동원해서 유대인들에게 해산을 명령했다.
이 명령을 승리한 쪽에서 즉각 따르지 않자. 그의 군대에게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지 않아도 못마땅하던 유대인들에 대해서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면서, 가장 무자비한 방법으로 지시를 하였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이것으로 만족스럽지 않았던지 벨릭스는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가 해마다 증가했고, 이번에는 군인들에게 부잣집을 약탈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이 불공정하고 잔인하게 대담한 행동으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벨릭스에게 공식적원 항의를 했고, 이 문제에 대해 대답을 하도록 로마에 소환되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강요와 압박이 그들에게 충분한 불평의 근거를 제공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아직도 그들은 회유하려는 희망이 있었다. 이후 그는 비록 바울을 진정으로 존경하게 되었지만, 그를 옥에 남겨두어 그들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비록 추방이나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직분을 박탈당했고, 부당하게 축적된 부의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그의 죄악의 상대였던 드루실라도 얼마 후에, 그들의 외아들과 함께 베수비우스 화산의 폭발로 죽고 말았다. 그의 시대는 불명예스럽고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끝나고 말았다. 바울이 이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관하여 그와 함께 논의했을 때, 한 줄리 하늘의 빛이 벨릭스에게 비칠 기회가 왔었다. 그의 죄악을 깨닫고 죄를 버릴 수 있도록 하늘이 보낸 기회였다. 그러나 벨릭스는 하늘의 사자에게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라고 말했다. 그에게 제공된 최후의 은혜를 멸시해 버렸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다른 초청을 다시는 받을 수 없었다.
저 자 : 엘렌 G. 화잇
출 판 : 시조사
구입처 : (02) 3299-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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