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보내는 권면 // 서론 ②
(바르셀로나에서)
교회에 보내는 권면 // 서론 ②
14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이 그 침상에서 꿈을 꾸며 뇌 속으로 이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력에 전술하니라"(단 7:1). 다니엘은 몇몇 실례들을 가지고 자기에게 계시된 것에 대하여 말할 때에 "재가 밤 이상 가운데 보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화잇 부인의 경험 가운데 밤 시간에 그의 정신 활동이 쉬고 있을 때에 묵시를 받은 적이 종종 있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그 서두로 시작한 것을 보게 된다. "밤 이상 가운데서 어떤 사건이 나에게 분명히 제시되었다"라고 한 바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선지자에게 예언적 꿈으로 자주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언적인 꿈과 밤의 이상 그리고 일반적인 꿈과의 관계에 대해서 의문이 일어날지 모른다. 화잇 부인은 이에 대해서 1868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리고 일반적인 꿈과의 관계에 대해서 의문이 일어날지 모른다. 화잇 부인은 이에 대해서 1868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일상생활의 사물에서 기인되는 꿈들이 많이 있다. 이런 꿈에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아무런 관계를 하시지 않으신다. 거짓 이상이 있는 것과 같이 거짓 꿈도 또한 있는 바 이런 꿈들은 사단의 영에 충동을 받은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꿈들은 이상이 그러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류해 낼 수 있다. 이와 같은 꿈들은 이런 꿈을 꾼 인물과 또 그 꿈을 받은 환경을 참작하면 그 꿈이 순수한 것인지의 여부를 스스로 증명하여 준다." 한 번은 화잇 부인의 만년에 그의 아들 W. C. 화잇 장로가 확실한 지식이 부족한 자들에게 알려 주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화잇 부인에게 하였다. "어머니, 어머니는 밤에 계시를 받으셨다고 하는 이야기를 종종 하시고 꿈속에 빛이 임한 것이 대해서 말씀하시는데요. 우리는 다 꿈을 꿉니다. 어머니께서 매우 빈번히 말씀하시는 그 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그는 이와 같이 답변하였다. "그 까닭은 낮의 이상 가운데 내 곁에 서서 너에게 가르쳤던 바로 그 같은 천사인 사자가 밤의 이상 가운데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여기에 언급된 하늘 천사는 어떤 때에는 "천사", "내 안내자", "내 교사" 등의 말로 표시하였다. 그 선지자의 마음속에는 혼란도 없었고 밤 시간에 임한 계시에 대한 의문도 없었다. 그 까닭은 그 계시와 관련된 환경 자체가 그 계시가 하나님에게서 온 교훈임을 명백히 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때에도 화잇 부인이 기도하거나 말하거나 혹은 쓰고 있는 동안에 묵시가 그에게 주어졌다. 그가 공석에서 말하거나 기도하는 도중에 잠깐 중단되지 않는 한 그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 묵시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는 한 번 이와 같이 기록하였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을 때에 나는 주위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정신을 잃었다. 방은 빛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나는 대총회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회중에게 기별을 들려주고 있었다." 화잇 부인의 70년이라는 긴 봉사의 생애를 통하여 그에게 주어진 많은 묵시 중에 가장 긴 묵시는 네 시간을 계속하였으며 가장 짧은 묵시는 바로 순식간에 마쳤다. 때때로 그 묵시들은 한 반 시간이나 그보다 좀 더 긴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모든 묵시를 통하여 한 가지 규칙이 적용된다고는 말할 수가 없으니 그것은 바울이 기록한 바와 똑같기 때문이다. "엣적에 선지자들이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히 1:1)라 하였다.
15 묵시를 통하여 빛이 선지자에게 주어졌으나 선지자들은 그 묵시를 보는 중에 기록하지는 아니하였다. 그의 일은 기계적인 사무가 아니었다. 드문 예를 제외하고는 주께서 선지자에게 말할 바로 그 말을 지시하시지는 않았다. 또 천사가 선지자의 손을 인도하여 꼭 기록할 그 말을 기록하게 한 것도 아니었다. 묵시로 말미암아 빛을 받은 정신을 가지고 선지자는 말을 하거나 기록하여 그 빛이나 교훈을 정중하게 전달하였으며 청중들은 이를 기별로 읽거나 구두로 전하여 듣거나 한 것이다. 우리는 선지자의 마음이 어떻게 빛을 받았는가 어떻게 그 지식과 교훈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하였는가 하고 물을지도 모른다. 묵시를 줄 때에 아무런 규칙이 세워져 있지 않는 것처럼 선지자가 영감적인 기별을 받는 방법을 통제하는 규칙도 또한 세워질 리가 없다. 그러나 묵시를 받을 때마다 그것은 매우 생생한 경험이어서 서진자의 마음속에 그 경험을 지울 수 없는 감명을 남겼다. 그리고 마치 우리가 보도 경험하는 바가 귀로 듣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인상을 우리 마음에 새기는 것처럼 선지자들과 저들에게 나타난 사건의 발생을 실지로 목격한 것처럼 생각되었으므로 저들의 뇌리에 기포도 영속적인 감명을 주었던 것이다. 전항(前項)의 대쟁투 묵시의 이야기를 말할 때에 우리는 역사적인 사건에 관한 지식이 어떻게 그에게 임하였는지를 말하는 그의 말을 인용하였다. 또 다른 한 번은 빛이 어떻게 그에게 임하였는지를 설명하다가 그는 묵시 중의 상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나의 주의력은 지상에서 일어나는 장면으로 종종 향하여진다. 때로는 나는 먼 미래에로 이끌려가서 일어날 일을 본다. 그다음에 다시 나는 과거에 일어났던 장면을 보게 된다." 이 말로 미루어 보아 엘렌 G. 화잇은 마치 실지로 목격한 사람처럼 이런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 명료하여진다. 사건들이 묵시 중에 그의 앞에 재연되었고 그러므로 그의 뇌리에 생생한 인상을 새겨 준 것이다. 또 다른 어떤 때에는 나타난 장면에 자기가 실지로 참여하고 느끼고 보고 듣고 순종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물론 그가 실제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인상이 그의 뇌리에 잊힐 수 없는 모습으로 남은 것이다. 52쪽에서 58쪽까지에 실린 그의 맨 첫 번 묵시는 이런 성질의 것이었다. 다른 어떤 경우들에는 묵시를 받는 중에 엘렌 G. 화잇이 먼 곳에 위치하고 있는 집회나 가정이나 기관에 참석한 것처럼 느껴지는 때도 있었다. 이런 회집에 참석하였다는 느낌이 너무도 생생하여서 화잇 부인은 각개인들이 취한 행동이나 말을 자세히 지적할 수가 있었다. 한 번은 묵시를 보는 중에 화잇 부인이 우리 의교 기관 중의 하나에 여행하는 병실을 방문하며 되어 나가는 모든 것이 보는 것과 느낌을 가진 적이 있다. 이 경험에 관하여 그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천박한 이야기, 어리석은 농담, 뜻 없는 웃음이 귀에 따갑게 들렸다.... 나는 사람들이 시기심에 빠지는 것을 보았고 또 질투하는 말과 분별없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을 때에 놀랐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찬사들의 낯을 붉히게 했다. 그다음에 그와 같은 기관의 보다 더 유쾌한 상태가 드러났다. 그는 "기도의 음성이 들려오는 "병실로 안내함을 받았다. "그 소리는 얼마나 귀를 즐겁게 하였던가!" 이 기관에 가상적인 방문을 한 것과 또 여러 같지 아니한 분분과 병실로 데리고 다니면서 안내하는 듯하던 천사의 말을 기초로 하여 교훈의 기별을 기록되었다.
16 화잇 부인에게 매우 생생한 상징적인 표시로 빛이 주어지는 때가 자주 있었다. 이와 같은 상징적 표시는 위기 가운데 빠진 듯이 보였던 지도적인 교역자에게 보내진 개인적인 기별에서 발췌된 다음의 세문장 소에서 분명히 설명되어 있다. "또 한 번은 당신은 말에 올라타서 깃발을 들고 가는 한 장군처럼 내게 나타났습니다. 한 사람이 와서 당신의 손에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이라고 써진 기를 빼앗아서 진흙 속에다 짓밟았습니다. 나는 당신이 세상과 연결시켜 주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때로는 두 개의 같지 아니하는 견해가 화잇 부인 앞에 제시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즉 이런 계획이나 정책을 따르면 이런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예증하는 것이 그 하나요 또 한 의견은 다른 계획 정책을 따라야 일이 더 잘 된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 사실에 대한 훌륭한 예증은 미국 서부의 로마린다 건강 식료품 공장의 위치 선정 문제와 관련시켜서 찾아볼 수 있다. 총무와 그 협력자들은 위생병원 본관 곁에 큰 건물을 세울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 계획이 성숙해 가는 동안 수백 마일 떨어진 자기 집에 화잇 부인이 어느 날 밤에 두 개의 묵시를 받았다. 두 개의 묵시 중 첫 번째 것이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많은 식료품이 만들어지는 큰 건물을 보았다. 빵 제조소 옆에는 또한 작은 건물들이 몇 개 있었다. 내가 곁에 서 있을 때에 행하여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 큰 음성으로 다투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교역자들 간에 협력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혼란이 들어왔었다." 그다음에 화잇 부인은 교역자들을 융합시키기 위하여 이들을 설복시켜 보려고 고민하는 총무의 모습을 보았다. 화잇 부인은 환자들이 이런 다투는 소리를 엿듣고서 병원 바로 이웃인 "이런 아름다운 지역에 식료품 공장이 세워진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말을 하는"것을 보았다. "그 후에 한 분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실물 교훈으로서 네 앞에 지나가게 한 것은 네가 어떤 계획을 수행하는 데 따르는 결과를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라고, " 그다음에 장면이 바뀌고 그는 식료품 공장이 "병원 건물에서 떨어진 철로로 가는 길가에" 있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는 사업이 겸손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일치하게 행하여지고 있었다. 묵시를 본 지 몇 시간 내에 화잇 부인은 로마린다의 교역자들에게 편지를 썼고 이 편지를 식료품 공장을 어디에 세우느냐 하는 문제는 일단락을 지었다. 만일 원래의 계획대로 수행하였다면 후년에 병원 바로 곁에 큰 상업 건물을 짓는 데 크게 고난을 당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자가 여러 방법으로 묵시를 통하여 기별과 교훈을 밤낮으로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지자가 말하기도 하고 혹은 쓰기도 하면서 교훈과 지식의 기별을 백성들에게 전한 것은 빛을 받은 정신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이 일을 행할 때에 화잇 부인은 하나님의 영의 도움을 받았으나 거기엔 기계적인 통제는 없었다.
17 그에게는 기별을 전달할 수 있는 말을 선택할 자유가 있었다. 그의 봉사 생애의 초년기에 그는 우리 교회 잡지에 이와 같이 기록하였다. "내가 묵시를 받고 이를 기록할 때에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에 의지하긴 하지만 내가 본 설명할 때에 쓰는 말은 내가 스스로 택해서 쓰는 말이다. 만일 그 묵시가 천사로 말미암아 내게 말하여진 것이면 나는 항상 그것은 인용 부호로 표시를 해 좋았다."
엘렌 G. 화잇의 생애와 사업
엘렌 G. 하아몬과 그의 쌍둥이 형제는 미국 동북 지방에 메인 주 골함에서 1827년 11월 26일에 탄생하였다. 아홉 살 되던 해에 엘렌은 한 분별없는 동급생이 던진 돌로 말미암아 불의의 사고를 당하였다. 심한 면상(面橡)은 거의 그의 생명을 앗아갈 뻔하였고 그를 허약한 상태에 빠뜨려서 결국 그는 학교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열한 살 되던 때에 그는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고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바다에서 침례를 받아 감리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그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메엔 주 포틀랜드에서 열린 재림신자들의 회집에 참석하여 월리암 밀러와 그의 동료들이 제시하는 바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깝다는 견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구주의 돌아오심을 확신을 가지고 고대하기 시작하였다. 1844년 12월 어느 아침에 그가 다른 네 여인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임하였다. 처음에 그는 지상의 사물에 대해서 의식을 잃었다. 그다음에 상징적인 계시를 통하여 그는 재림신도들이 하나님의 성을 향하여 여행하는 것과 충실한 자들이 보상을 받는 것을 목격하였다. 17세의 이 소녀는 무서워하면서 이 묵시와 다음에 계속된 묵시를 포틀랜들에 있는 그이 동료 신자들에게 이야기하였다. 그 후 기회가 올 때에 그는 그 묵시들을 메인 주와 구 근방의 주(州)에 있는 재림신도들의 단체에서 자세히 설명하였다. 1846년 8월에 엘렌 하아몬은 젊은 재림교 목사 제임스 화잇과 결혼하였다. 그 후 35년 동안 화잇 부인의 생애는 1881년 8월 6일에 그의 남편이 죽을 때까지 불굴한 복음 사업에 있어서 남편의 생애와 밀접한 연결을 가졌었다. 그들은 설교하고 저술하며 세우고 건축하여 조직하고 행정을 하면서 미국을 광범하게 여행하였다. 화잇 장로 부부와 그 동료들이 놓은 기초가 얼마나 광범하고 튼튼하며 또 그들이 얼마나 현명하고도 훌륭하게 세워 놓았느냐 하는 것은 시간과 시련이 이를 증명하였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재림신자들 사이에서 1849년과 1850년에 출판 사업을 시작하여 50년대 후기에는 교회 재정의 건전한 제도를 가진 교회 조직을 발전시키는 일에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것은 1863년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대총회 조직을으로 말미암아 그 절정에 이르렀다. 60년대 중기(中期)에는 우리 의료 사업이 그 시작을 보게 되었고 우리 교회의 대 교육 사업은 70년대 초엽에 그 시작을 보게 되었다. 해마다 천막 집회를 개최할 경영이 1868년에 시작되었고, 1874년에는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가 최초의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18 이런 모든 발달은 하나님께서 엘렌 G. 화잇을 통하여 이 신도들에게 주신 많은 구두(口頭)와 기록된 권면으로 말미암아 지도되었던 것이다. 초기의 대부분의 통신은 개인에게 하는 편지의 형식이나 또는 최초의 정기 간행물이던 현대 진리에 기사를 실림으로 행하여졌다. 화잇 부인은 1851년 비로소 64쪽으로 된 그의 최초의 책을 "그리스도인의 경험과 엘렌 G. 화잇의 견해의 개요"라는 제목을 붙여서 발행하였다. 1855년 초에 일련(一連)의 번호를 붙인 소책자 발행되었는데 각 책마다 교회 증언이라는 제목이 새겨져 있었다. 시시때때로 하나님께서 가려서 보내신 이 교훈과 교정의 기별로 말미암아 당신의 백성들을 축복하고 견책하며 인도하실 수 었었다. 이 교훈에 대한 계속적인 요구에 응하기 위하여 1885년에 네 권으로 묶어서 재발행하였고 1889-1909년에는 다른 권들을 추가 발행하여 교회 증언은 9권으로 한 질(帙)을 이루었다. 화잇 가정에 네 자녀가 태어났다. 장남 헨리는 열여섯 살에 죽었고 막내아들 허버트는 3개월 만에 죽었다. 가운데 두 아들 에드손과 월리암이 장성하여 각각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의 사업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봉사하였다. 대총회의 요청에 따라 화잇 부인은 1885년 여름에 유럽으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유럽 대륙에서 새로 발전되는 사업을 굳게 하면서 2년을 보냈다. 스위스의 바셀에다 본거지를 두고 그는 남부, 중앙, 북부 유럽을 광범하게 여행하면서 교회의 총회에 참석하고 신자들의 집회에서 이들과 만났다. 미국에 돌아온 지 4년 후에 63세의 화잇 부인은 대총회의 부름에 응하여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는 9년간을 거주하면서 사업을 개척하고 발전시키는 일을 도와주었으며 특히 교육, 의료 분야를 도와주었다. 화잇 부인은 1900년에 돌아와서 미국 서부 지방인 캘리포니아주의 세인트 헬레나에 집을 정하고 1915년에 별세하기까지 거기에서 살았다. 미국에서 60년, 해외에서 10년이라는 긴 봉사의 생애 동안에 화잇 부인은 교회와 공중 집회와 대총회 회의들에 대하여 지칠 줄 모르는 노력으로 권하고 이 큰 운동의 성장을 크게 성취시킨 거의 2천이나 되는 묵시를 받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기별에 관련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를 제시하는 과업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였다. 그의 저서는 총계 10만 페이지 이상에 달하고 있다. 그의 펜으로 쓴 기별은 개인적인 통신을 통하여 또는 우리 교회 기관지에 내는 매부 기사와 그의 많은 책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전하여졌다. 그 문제들은 성경 역사. 매일의 그리스도인 경험, 건강, 교육, 전도 및 다른 실제적인 논제 등을 취급하고 있다.
지은이 : 엘렌 G. 화잇
출판사 : 시조사
대표전화 : (02) 3299-5300
www.hanwanso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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