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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업/교회에 보내는 권면

교회에 보내는 권면 // 서론 ③

by 동심초(남양주) 2025. 1. 4.

  교회에 보내는 권면 // 서론 ③  

  (바르셀로나에서)  

 

 

 19  그가 쓴 46권의 책 중의 몇 책은 세상의 주요한 방언들로 인쇄되어 여러 백만 부가 판매되어 왔다. 81세 때에 화잇 부인은 1909년의 대총회에 첨석 하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대륙을 횡단하였다. 그의 여생 6년은 그의 문필 사업을 완성하는 데 소비되었다. 그의 생애가 거의 끝날 무렵에 화잇 부인은 이런 말을 기록하였다. "나의 생명이 더 계속되든 말든 간에 나의 저서는 계속하여 말할 것이며 그 사업은 시간이 존속하는 한 전진할 것이다."  불굴의 용기와 구주에 대한 온전한 신뢰를 가지고 그는 1915년 7월 16일 그의 자택에서 별세하여 미시간 주 배틀크릭에 있는 오크힐 묘지에 남편과 아이들의 곁에 매장되었다. 화잇 부인은 그의 동료 교역자와 교회와 가족들에게서 경건한 어머니요 열심 있고 관대하며 지칠 줄 모르는 신앙적 일꾼으로 여김을 받았다. 그는 교회 직원의 공직을 갖지 아니하였다. 그는 교회의 앞에 그리고 자기 자센에게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주신 기별을 가진 "사자"로 알려진 바 되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로 자기를 쳐다보라고 요구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받은 선물로 재산이나 인기를 모으려는 데 사용한 적도 없었다. 그의 생애와 그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업을 위하여 바친 바 되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대중 주간지인 인디펜덴트의 편집인은 1915년 8월 23일 자 지면에서 부인의 충실한 생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이 논평을 끝맺었다. "그는 그의 계시를 믿는 일에 전적으로 정직하였다. 그의 생애는 그 계시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는 영적 자만을 보이지 아니하였으며 불결한 이익을 구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보람 있는 여선지자의 생애를 살았고 또 그에 합당한 사업을 하였다." 화잇 부인은 자기가 죽기 몇 년 전에 교회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관리위원회를 만들어서 그의 저서를 그들에게 일임하여 그 관리와 계속적인 출판에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미국 워싱턴 D. C. 에 있는 대총회, 즉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세계본부 직원들과 협력하여 이 의원회는 엘렌 G. 화잇의 서적을 영어로 계속적으로 출판 발행하도록 장려하고 그 책의 전체 혹은 일부를 다른 나라 말로 발행하도록 하고 있다. 저들은 또한 정기 간행물에 실린 기사와 원고를 편찬하여 몇 개의 책을 발행하였는데 이것은 화잇 부인의 교훈과 일치하는 처사이다. 이 책도 이 위원회의 인가를 받고 발행된 것이다.

  남들이 아는 엘렌 G. 화잇  

화잇 부인이 주의 사자로서 비범한 경험을 가진 것을 알고있던 이는 이렇게 물었다. 그의 사람됨은 어떠하였는가? 그는 우리가 가지는 바와 같은 문제를 가졌던 사람인가? 그는 부자였는가 혹은 가난하였는가? 그는 항상 미소하고 있었는가? 화잇 부인은 가려 깊은 어머니였다. 그는 알뜰한 가정 주부였다. 그는 가끔 신자들을 자기 집에 환대하는 친절한 안주인이었다. 그는 유용한 이웃이었다. 그는 확신의 여인이었고,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요, 태도와 음성이 부드러웠다.

 

 20  그의 경험 가운데는 침울하거나 웃음과 기쁨이 없는 신앙이 자리를 차지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옆에 있으면 마음에 온전한 안전감을 느꼈다. 아마 화잇 부인은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그가 매일의 일기를 처음으로 기록 한 1859년에 그의 가정을 방문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화잇 가족이 배틀크릭의 변두리에서 살았던 것을 알게 된다. 작은 농가였으나 대지가 넓어서 정원이 있었으며 몇 개의 과실나무와 한 마리의 소와 몇 마리의 닭 그리고 아이들이 일하고 놀 수 있는 마당이 있었다. 이때에 화잇 부인은 서른한 살이었고 화잇 장로는 서른여섯 살이었다. 그 당시에는 가정에 세 아이가 있었고 그 연령은 각각 넷, 아홉, 열둘이었다. 우리는  또 가정에 선량한 그리스도인 소녀를 고용하여 집안일을 돕게 한 것은 알게 될 것이다. 그 까닭은 화잇 부인이 종종 집에서 나가 있어서 설교와 저작에 분망 한 때가 잦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화잇 부인이 요리, 청소, 빨래 그리고 바느질 등 가정의 책임을 수행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출판소에 가서 조용한 곳에서 글을 쓸 때도 여러 날 있었다. 또 다른 날들에는 그가 정원에서 꽃과 채소를 심고 종종 이웃 사람과 꽃을 교환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자기 가족을 위하여 될 수 있는 한 가정을 명랑하게 만들어 보려고 결심하여 아이들로 가정을 가장 있을 만한 곳이라고 생각하도록 하였다. 화잇 부인은 알뜰한 구매자(購買者)이기도 하여서 이웃 재림신자들은 그와 함께 장 보러 갈 수 있게 되면 좋아하였다. 왜냐하면 화잇 부인은 물건의 가치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매우 실무적인 여인이어서 딸들에게 많은 가치 있는 교훈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는 잘못 만들어진 물건은 질이 좋은 상품보다 결국은 훨씬 비싸다는 것을 알았다. 자녀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주일 중 가장 즐거운 날이었다. 물론 가족은 으레 교회 예배에 참석하였고 화잇 장로 부부가 설교를 맡지 아니한 경우에는 예배드리는 동안 가족이 함께 앉곤 하였다. 점심에는 다른 날에는 나오지 아니하는 특찬을 준비하였고 점심이 끝난 후 날씨가 명랑하면 화잇 부인은 아이들과 함께 숨이나 강변을 거닐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관찰하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음미하곤 하였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추우면 집안의 날로 주위에 아이들을 모아 놓고 책을 읽어 주었으며 때로는 그가 여행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모은 재료에서 빼내어 읽어 주기도 하였다. 이 이야기 중의 얼마는 후에 책으로 인쇄되어 다른 부모들이 저희 자녀들에게 읽어 줄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당시 화잇 부인의 건강은 그다지 양호하지 못하여 낮 동안에는 가끔 현기증을 일으켰으나 이것이 그의 가정 일은 물론 주의 사업을 계속해하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다. 수년 후인 1863년에 그는 건강과 병자의 간호에 대한 묵시를 받았다. 그는 묵시 중에서 적당한 의복을 입는 것과 먹는 식물과 적당한 운동과 휴식의 필요와 아울러 튼튼하고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신뢰함의 중요성을 보았다. 음식물에 관하여 하나님에게서 받은 빛과 육식의 유해성이 육식은 건강과 원기에 요기하다는 화잇 부인 자신의 의견을 취소하게 하였다.

 

 21  그는 자기의 마음을 비치는 묵시는 빛을 받아 가족의 식사 준비를 돕는 소녀에게 곡식과 채소와 견과와 우유, 크림, 계란 등으로 만들어진 건전하고 단순한 식물만을 식탁에 놓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거기는 많은 실과가 있었다. 가족이 식탁에 왔을 때에 거기에는 훌륭하고도 건전한 식물이 많았으나 육식은 없었다. 화잇 부인은 고기는 몹시 먹고 싶어도 다른 음식에는 생각이 없었으므로 자기가 다시 돌아와서 단순한 식물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때까지 식탁을 그냥 좌두기로 결정하였다. 다음 식사 때에는 같은 경험을 가졌으나 단순한 식물은 구미가 당기지 아니하였다. 그 후 다시 그들은 식탁에 왔다. 거기에는 건강과 기력과 성장에 가장 좋다고 묵시 속에서 지기를 받은 바 단순한 식품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습관화된 고기를 몹시 먹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제 고기가 가장 좋은 식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손을 배 위에 얹고 "네가 빵을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라고 하는 말을 자기의 배더러 말했다고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다. 그 후 오래지 아니하여 엘렌 G. 화잇은 단순한 식품을 즐겨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이 식사의 변화로 말미암아 그의 건강이 즉시로 양호하여져서 그의 여생은 비교적 좋은 건강 상태를 향유하였다. 이로 보아 화잇 부인도 우리 모두가 당하는 어려운 문제를 역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가 마땅히 승리를 거두어야 하는 것처럼 화잇 부인도 자신의 경험에서 식욕을 극복하여 승리를 거두어야만 했다. 건강 개혁은 전 세계를 통하여 수많은 재림교인의 가족에게 축복이 되어 온 것처럼 화잇 가족에게도 큰 축복을 가져다주었다. 건강 개혁에 관한 묵시를 받고 화잇 가정이 환자를 치료하는 단순한 방법을 채택한 후에 화잇 장로 부부는 이웃 사람이 앓아누웠을 때에 종종 초청을 받아 치료하는 일을 도와주었는데 주께서는 그들의 노력에 크게 복을 주셨다. 다른 때에는 환자가 저희 집에 운반되어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친절히 간호를 받은 적도 종종 있었다. 화잇 부인은 산이나 호수나 바다에서의 소창(消暢)이나 휴양하는 시간을 즐겼다. 중년에 이르러 그가 미국 서부 지방의 우리 출판사인 태평양 출판소 근처에서 살고 있을 때에 하루를 휴식과 휴양으로 보내자는 초청을 받았다. 화잇 부인의 가정과 직원 가족은 출판소 가족과 동행하자는 요청을 받고 그 초청을 곧 수락하였다. 그의 남편은 교회 사무로 동부 지방애 출장 중이었다. 그가 이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을 발견한 것은 남편에게 보낸 편지에서였다. 해변에서 건전한 점심을 즐긴 후에 모든 무리가 샌프란시스코 만에 보트 놀이를 하러 갔다. 배의 선장은 교인이었으며 명랑한 오후였다. 이어서 그들은 넓은 바다로 나가기를 제의하였다. 그 경험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엘렌 G. 화잇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파도가 높았으므로 우리는 아래위로 크게 요동하였다. 나의 감정은 부풀었지마는 아무에게도 말을 건제니 아니하였다. 참으로 장쾌하였다! 물보라가 우리에게 부딪쳐 왔다. 금문교 바깥은 바람이 세었으나 나의 생애에 이렇게 즐거워한 적은 없었다!" 그다음에 그는 선장의 주시하는 눈과 그의 명령에 언제라도 순종할 자세를 갖춘 선원을 바라보고 이렇게 명상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손으로 바람을 잡으신다. 그가 물결을 제어하신다. 우리는 깊고 광활한 태평양 바다 위의 조그마한 점에 지나지 아니하다. 그러나 파도 위를 달리는 이 작은 보트를 보호하기 위하여 하늘의 천사들이 보냄을 받았다. 아,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여! 우리의 지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는 한눈에 가장 높은 하늘과 바다의 중심을 보시는구나!" 화잇 부인은 일찍부터 명랑한 태도를 취하여 왔다. 한 번은 이렇게 질문하였다. "당신은 내가 우울해하고 낙담하며 불평하는 일을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이것을 막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결론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품성과 봉사의  참다운 이상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예수께서 충심으로 지원해서 하는 봉사는 밝은 신앙을 가져다줍니다. 그리스도를 가장 밀접하게 따라가는 사람들은 우울한 적이 없습니다."

 

 22  또 다른 떼에는 이와 같이 기록하였다. "어느 때인가는 명랑이란 그리스도인 품성의 위엄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을 품어 본 적이 있었으나 그것은 잘못이다. 하늘은 모두가 즐거운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만일 자신이 미소한다면 미소가 자기에게로 되돌아올 것이요, 친절한 말을 한다면 친절한 대신 듣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그가 고통을 크게 당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이와 같은 일이 한 번은 그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사업을 돕기 위하여 갔던 직후에 있었다. 그는 거의 일 년 동안을 몹시 앓고 심한 고통을 당하였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침상에 누워서 밤에는 두어 시간밖에 잘 수가 없었다. 이 경험에 대해서 그는 한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는 내 자신을 처음에 발견하였을 때에 나는 망망한 바다를 건너온 것은 깊이 뉘우쳤다. 내가 왜 미국에 머무르지 않았을까? 이런 손해를 보면서 왜 내가 이 나라에 있을까? 나는 재삼 침상의 이불속에 얼굴을 파묻고 어지간히 울었다. 그러나 나는 오래도록 이런 화사한 눔물속에 잠겨 있지 아니하였다. 나는 스스로 이렇게 질문하였다. 엘렌 G. 화잇아, 네가 어쩐 일이냐? 네가 오스트레일리아 오는 곳은 대총회에서 네가 거기 가는 것이 가장 좋다고 판단한 바로 그곳으로 가는 것이 네 의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 아니냐? 이것은 네가 이제까지 실천해 온 바가 아니냐? '그렇다'로 나는 말하였다. 그렇다면 왜 거의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낙심하고 있느냐? 이것이 원수가 시키는 일이 아니냐? '그렇다고 생각한다'라고 나는 말하였다. 나는 얼른 눈물을 닦고 말하였다. 이제는 됐다. 나는 이제 다시는 어두운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죽든지 살든지 나는 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그분께 내 영혼을 지켜 주시도록 의탁하겠다. 그리하여 나는 주께서 만사를 형통하게 해 주시리라고 믿었다. 이 어쩔 수 없는 무기력한 8개월 동안 나는 조금도 낙담하거나 의심하지 아니하였다. 나는 이 일을 이 나라의 당신의 백성들의 유익과 미국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과 내 자신의 유익을 위한 주의 크신 계획의 일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혹은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없으나 그것을 믿는다. 그리고 나는 이 괴로움 가운데서 행복하다. 나는 하늘 아버지를 신뢰할 수 있다. 나는 그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다." 화잇 부인이 그의 생에의 마지막 15년 동안을 캘리포니아의 자기 집에서 사는 동안 그는 점점 연로하여 갔다. 그러나 그는 작은 농장 주위에서 일하는 것과 그의 일을 보조하여 주는 사람들이 가족들의 행복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가 저작으로 바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가 일찍 잠자리에 들어갔을 때에는 자정이 지나면 흔히 일을 시작하곤 하였다. 날씨가 좋으면 그의 일이 허용하는 대로 촌으로 잠깐 동안 드라이브를 하는 바 그 도중에 혹 그가 지나는 집의 정원이나 현관에 서 있는 부인을 만나게 되면 거기 멈추어서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고 하였다. 때때로 그는 식량과 의복이 결핍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집에 가서 자기 가정용 비품에서 물건을 가져오곤 하였다. 그가 죽은 지 수년 호에도 그가 살던 산곡의 이웃 사람들은 그를 항상 예수의 이야기를 그렇게 친절하게 이야기하던 작은 백발의 여인으로서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죽을 당시에는 약간 넉넉한 필수품과 생애의 기본적인 안전을 가졌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를 모본으로 쳐다보도록 요청하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요,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으로서 부활하신 주의 공로에 의지하고 주께서 그에게 위탁하신 사업을 신실히 감행하는 자이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마음속에 신념을 가지고 그리스도인 경험을 일치하는 전생애를 끝마쳤던 것이다.

  생애를 변화시킨 기별  

 23  한 전도자가 미쉬 간 주 부슈넬에서 일련의 집회를 열었다. 그러나 침례를 베풀자 그는 신자들에게 기별에 합당한 지반도 잡아 주지 못한 채 신자들에게서 곧 떠나가 버렸다. 그 신자들은 조금씩 낙심하게 되었고 어떤 이는 저희 악습을 다시 행하기 시작하였다. 나중에는 교회가 매우 작아져서 남아 있던 10명 내지 12명의 교인들 이이제는 더 계속하여고 소용없다고 하는 결정을 보았다. 저들이 마지막 집회라고 생각한 모임을 산회시킨 직후에 우편물이 도착하였는데 그 편지 중에 리뷰 헤랄 드지가 있었다. 여행 일기란에 화잇 장로 부부가 1867년 7월 20일에 회집을 열기 위하여 부슈넬에 온다는 통고가 있었다. 그날은 앞으로 1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불러오게 하기 위하여 아이들을 보냈다. 숲 속에 장소를 마련하고 모두 나서서 저희 이웃을 초대하고 특별히 물러선 교인들에게 그리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7월 20일 안식일 아침에 화잇 장로 부부가 60명이 모인 숲에 도착하였다. 화잇 장로가 아침 설교를 하였다. 오후에 화잇 부인이 설교하기 위하여 일어섰으나 성경절을 읽은 후에 그는 당황해하는 빛을 보였다. 그는 그 이상 성경절을 해석하지 아니하고 성경을 덮고 아주 사사로운 방법으로 그들에게 말하기 시작하였다. "오늘 오후에 나는 여러분들 앞에 서서 벌썬 2년 전 묵시 중에 내게 보인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의 얼굴을 들여다볼 때에 여러분의 경험이 내 마음속에 똑똑히 상시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에게서 받은 기별을 여러분에게 전하여 드리겠습니다." "저기 소나무 곁에 계신 형제여, 소개를 받지 못하였으니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는 없습니다만 당신의 경험은 내 앞에 분명히 떠 오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 형제에게 그가 신앙에서 타락한 것에 대해서 말하였다. 화잇 부인은 그에게 돌아와서 하나님의 백성과 동행하기를 권장하였다. 다음에 청중의 다른 편에 있던 한 자매를 향하여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린 빌교회의 메이지날드 자매 옆에 앉은 자매는 내가 지시를 받지 아니하여 그 이름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만 2년 전 묵시 중에 당신의 사정을 보았으므로 당신의 경험에 대해서 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후에 화잇 부인은 이 자매에게 격려의 말을 주었다. "그다음 저 뒤편의 차나무 곁에 계신 형제여, 당신을 대면한 적이 없으니 역시 이름은 부를 수 없습니다만 당신의 입장이 내게 밝혀졌습니다." 그런 후에 그는 이 형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그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거기 있는 모든 사람에게 공개하고 그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리하여 그는 회중의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도 돌아가면서 2년 전에 묵시 가운데서 그에게 보인 것들을 말하였다. 화잇 부인은 책망의 말을 고사하고 격려의 말을 하면서 자기 설교를 마친 다음 자리에 앉았다. 회중 가운데서 한 명이 일어났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화잇 여사가 오늘 오후에 우리에게 말한 것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알고 싶습니다. 화잇 장로 부부는 전에 여기에 와 본 적이 없습니다. 저들은 우리들과 생면부지입니다. 화잇 여사는 우리 대부분의 이름들을 알지도 못합니다.

 

 24  그런데 그가 오늘 오후에 이곳에 와서 2년 전에 묵시를 받아 그 묵시 중에 우리의 사정들을 보았다고 말을 할 뿐만 아니라 하나씩, 하나씩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계속하여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생활하는 것과 속셈을 공개하니 이 모든 것이 각 사람의 입장과 실제로 부합합니까? 그렇잖으면 화잇 자매에게 어떤 실수를 한 것입니까? 알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일어섰다, 소나무 곁에 있던 사람은 일어나서 화잇 부인이 자기가 묘사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자기의 입장을 더 잘 묘사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는 자기의 자행자지한 것을 고백하였다. 그는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동행하겠다는 자기의 결심을 피력하였다. 그린빌 교회에서 온 메이날 그 자매 옆에 앉았던 자매도 간증하였다. 그는 화잇 여사가 자기의 경험을 자기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잘 말하여 주었다고 말하였다. 화잇 여가사 견책과 격려의 말을 한 참나무 곁에 있던 사람은 화잇 여사가 자기의 경우를 자기가 묘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잘 묘사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도 자복하였다. 죄가 배척함을 받았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셔서 부슈넬에는 심령의 부흥이 일어났다. 화잇 장로 부부는 그다음 안식일에 다시 와서 침례를 베풀었고 부슈넬 교회는 든든한 기반을 잡고 존속하였다. 주께서는 당신을 바라는 모든 자들에게 하시는 것과 같이 부슈넬의 당신의 백성들도 사랑하셨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가 회개하라"(계 3:19)라는 말씀이 거기 참석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떠올랐음에 틀림없다. 사람들은 주께서 저들을 보시는 것과 같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았을 때에 저들은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깨닫고 저희의 생애가 변화되기를 갈망한 것이었다. 이것이 화잇 부인에게 주어진 많은 묵시의 참된 목적이다. 화잇 장로가 죽은 후 오래지 않아 화잇 부인은 헬즈버그 대학 근처에서 살았다. 몇 명의 젊은 숙녀들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의 가정에서 머물렀다. 그 당시에는 머리에 간단한 그물을 써서 종일토록 머리를 깨끗하고 단정하게 하는 것이 습관으로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이 소녀들 중의 하나가 화잇 부인의 방을 지나다가 잘 만들어진 머리 그물을 보았는데 그것을 그가 갖고자 했다. 그것은 놓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그는 그것을 취하여서 그의 트렁크를 열고 그 꼭대기에다가 넣어 두었다. 조금 후에 외출하기 위하여 옷을 입으면서 화잇 부인은 그의 머리 그물을 살폈으나 찾지 못하여 그것을 쓰지 못하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가족이 함께 모인 저녁에 화잇 부인은 없어진 머리 그물에 대해서 채근해 보았으나 아무도 그것이 어디 있는지를 안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하루쯤이 지난 후에 화잇 부인이 학생의 방을 지나가는데 "트렁크를 열어라"는 음성이 들렸다. 트렁크는 그의 소유가 아니었으므로 그는 그것을 열고 싶지 않았다. 두 번째의 지시에 그는 그 음성이 천사의 음성임을 알았다. 뚜껑을 올렸을 때에 그는 천사가 그 말을 하였는지를 알았다. 왜냐하면 거기에 그이 머리 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이 다시 상면하였을 때에  화잇 부인은 그 그물이 절로 없어질 리가 없다고 말하면서 다시 물어보았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아니하므로 화잇 부인은 채근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며칠 후에 화잇 부인이 저술하는 손을 멈추고 쉬고 있을 때에 매우 짤막한 묵시를 받았다. 그는 한 소녀의 손이 머리 그물을 석유 등잔 속에 떨어뜨리는 것을 보았다. 그물은 불길에 닿자 불에 살라져 없어지고 말았다.

지은이   : 엘렌 G. 화잇

출판사   : 시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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