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교리/산상보훈

산상보훈 6장 // 비판하지 말고 행하라(2)

by 동심초(남양주) 2022. 2. 16.

 비판하지 말고 행하라(2) 

 천남성 

 

 

 비판하지 말고 행하라(2) 

 136  이 세상에서의 선물과 축복 또한 그러하다. 그대가 동료들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이 무엇에든지 간에 그대는 은혜를 적게 받은 모든 사람에 대해 그만큼 빚진 처지에 놓이게 된다. 재산이 많거나 생활의 안락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병든 자와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되 그들과 처지가 바뀌었을 때 그들에게 바라게 될 정도와 똑같이 돌보아야 할 더없이 신성한 의무를 진다. 황금률은 설교의 다른 곳에서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는 말로 동일한 진리를 암암리에 가르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은 선한 것이거나 악한 것이거나 간에 축복 혹은 저주의 형태로 우리에게 분명히 되돌아온다. 우리가 주는 것은 무엇이나 다시 받게 될 것이다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세상의 축복은 같은 방법으로 되돌아올 수가, 아니 종종 그렇게 되돌아온다. 우리가 주는 것은 필요한 때에 종종 네 배의 가치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이 외에도, 우리는 하늘의 모든 영광과 그 보화의 총체가 되는 하나님이 더없이 풍족한 사랑으로 인해 이 세상에서부터 온갖 종류의 선물로 보답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끼친 악 또한 다시 돌아온다. 정죄하고 낙심시키는 일을 거리낌 없이 해 온 사람은 모두 다른 사람들을 통과하게 한 그 땅을 자신도 지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동정과 친절의 부족 때문에 그들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도록 정한 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의 완고함을 미워하며 마음을 열고 예수께서 그 속에 거하시게 하도록 이끄신다. 그리하면 악이 선이 되고, 저주처럼 보이던 것이 축복이 된다.

 

 137  황금률의 표준이야말로 바로 그리스도교의 참 표준이다.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다 기만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주시기까지 귀중하게 여기신  인간을 낮게 평가하여 사람들을 경하게 여기도록 이그는 종교, 인간의 궁핍과 고난과 권리에 무관심할 때,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자들임을 입증하게 된다. 그리스도교가 세상에서 이 처럼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실제의 생활에서는 그분의 품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름은 이런 일로 인해 모독을 받는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신자들에게 비치던 희망찬 시대의 사도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아무도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지 않았다. "그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으며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었다."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사도행전 4장 32, 34, 33,  2장 46, 47절). 하늘과 땅을 살펴보라. 우리의 동정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한 자비의 행동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보다 더욱 능력 있게 나타나는 진리는 없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진리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황금률의 원칙을 실천할 때, 복음 사업에도 사도 시대에 나타난 것과 동일한 능력이 따를 것이다.


 138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마태복음 7장 14절).

 

그리스도 당시에, 팔레스틴 사람들은 대개 언덕이나 산 위에 위치한 성벽으로 둘린 마을에서 살았다. 일몰 때 닫히는 성문이 가파른 바윗길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저녁 무렵에 집으로 돌아가는 행인들은 밤이 되기 전에 성문에 도착하기 위하여 힘든 오르막길을 열심히 서둘러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늑장을 부리는 자는 성문 밖에 남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가정과 안식처로 이어지는 좁고 비탈진 길을 그리스도인의 노정에 대한 인상적인 상징으로 사용하셨다. 그분께서는 내가 너희 앞에 제시한 길은 좁고 그 문이 들어가기에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황금률이 모든 교만과 자기 본위의 마음을 제거해 버리는 까닭이다. 물론, 넓은 길도 있다. 그러나 그 종말은 멸망이다. 만일, 영적 생애의 길을 올라가고자 한다면, 그대는 계속해서 올라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르막길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적은 무리와 함께 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많은 무리가 내리막길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 전체가 온갖 세속적 마음과 이기주의와 교만과 부정직과 도덕적 타락을 가지고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을 갈 수가 있다. 각 사람은 자신의 의견과 주의에 따라 이기적인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무엇이나 할 소지를 가지고 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을 가는 데에는 따로 길을 찾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문과 길이 넓어 발이 사망으로 끝나는 길을 향하여 저절로 가지 때문이다.

 

 139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그 입구가 험하다. 만일, 늘 따라다니는 어떤 죄를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그 길이 들어가기에 너무 좁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주님의 길을 계속해서 가고자 한다면, 자신의 길과 자신의 뜻과 자신의 악한 습관과 행동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하는 자는 의견을 따르거나 세상의 표준에 맞출 수 없다. 하늘의 길은 높은 지위와 부를 그대로 가지고 들어가기에도 너무 좁고, 자기중심적인 야망을 불태우기에도 너무 협소하며, 안락을 즐기며 오르기에도 너무 험하고 거칠다. 그리스도의 몫은 고통, 인내, 자아, 희생, 비난, 궁핍 그리고 당신을 대항하는 죄인들의 반박이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낙원에 꼭 들어가고자 한다면, 우리도 이러한 몫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올라가는 길은 힘든 길이며 내려가는 길은 쉬운 길이라고 결론을 내리지 말라.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에도 줄곧 고통과 형벌이 있고, 슬픔과 실망이 있으며, 가지 말라는 경고가 있다. 부주의하고 완고한 사람들이 쉽게 자멸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사단의 길이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모두 기만이다. 악의 길에는 쓰라린 후회와 점점 깊어가는 고뇌가 있다. 우리는 교만과 세속적 야망을 좇는 것을 즐겁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종말은 고통과 슬픔이다. 이기적인 계획은 전도가 유망하게 보이도록 하고 즐거운 희망을 간직하게 해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자아 중심의 소망 때문에 행복이 깨어지고 생애가 비참하게 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리막길은 그 입구가 꽃으로 밝게 빛날지 모르나 가시가 있다. 입구에서 빛나던 희망의 빛이 절망의 흑암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끝없는 밤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된다.


 140  

"궤사 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그러나 지혜의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잠언 13장 15절, 3장 17절).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모든 행동, 그분을 위한 모든 극기의 행동, 훌륭하게 견디어 낸 모든 시련, 유혹에서 거둔  모든 승리는 최후 승리의 영광을 향하여 나가는 행진의 발걸음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도자로 삼으면, 그분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해 주실 것이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길을 잃어버릴 필요가 없다. 떨고 있는 어떤 구도자도 순결하고 거룩한 빛 가운데서 걸어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비록 길이 너무 좁고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죄가 용납되지 않을지라도,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의심하고 떠는 영혼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지 않으신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길이 험하며 오르막길이 비탈져 있고 우편과 좌편에 함정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여행길에서 겪는 고통을 견디어야 할 것이다. 피곤할 때에도, 안식이 그리울 때에도 계속해서 수고해야 하며, 연약할 때에도 싸워야 하고, 낙심될 때에도 계속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인도자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마침내 소망의 항구에 틀림없이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먼저 그 험한 길을 친히 걸어가셨고, 우리의 발을 위하여 그 길을 평탄하게 하셨다. 그리고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은 비록 가파르지만 하나같이 피곤한 자들에게 생기를 주는 기쁨의 샘이 있다. 지혜의 길을 걸어가는 자들은 환난을 당할지라도 크게 기뻐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사랑하시는 그분께서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들 곁에서 동행하시기 때문이다. 위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갈 때마다 그들은 그분의 손길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고, 매 걸음마다 보이지 않는 분에게서 나오는 더없이 밝은 영광의 빛이 그들의 길을 비추어 준다. 그리고 저들의 찬양의 노래는 더 높은 곡조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잇는 천사들의 노래와 합하기 위하여 상달된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언 4장 18절).


 141          

"좁은 문으로 들어가 그를 힘쓰라"(누가복음 13장 24절).

 

해가 지기 전에 성문에 도착하기 위하여 서두르는 저문 길의 나그네는 길가에 있는 그 어떤 매력적인 것에도 한눈을 팔 수가 없었다. 그는 오로지 성문으로 들어가는 한 가지 목적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 생애에도 목적에 대한 이와 동일한 열성이 필요하다. 나는 너희에게 나의 나라의 참 영광인 품성의 영광을 보여 주셨다. 그것은 세속적 권력에 대해서 너희에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지만 너희가 최고의 욕망을 가지고 노력을 쏟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세상의 대제국의 패권을 쥐기 위하여 싸우도록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싸워야 할 싸움이 없고 쟁취해야 할 승리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지 말라. 나는 너희가 나의 영적 왕국에 들어오기 위하여 노력하고 필사적으로 싸우라고 명령하는 바이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하나의 싸움이며 진군이다. 그러나 얻어야 할 승리는 힘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싸움의 장소는 곧 마음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 인류가 지금껏 싸운 가장 큰 싸움은 자아를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것, 곧 마음을 사랑의 주권에 바치는 것이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난 옛 본성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유전적 성향 곧 이전 습관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142  영적 왕국에 들어가려도 하는 사람은 암흑의 왕국에 세력을 등에 업고 있는, 거듭나지 않은 본성에서 나오는 모든 능력과 정욕이 자신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기심과 교만은, 저희를 죄악적인 것으로 지적해 주는 것은 무엇이나 대항하여 싸우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배권을 쟁취하기 위해 애쓰는 악한 욕망과 습관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길 수 없다. 우리는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강력한 원수를 정복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수 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자아와 또 자신의 의지와 습관을 정복하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의 동의와 협력이 없으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실 수 없다. 성령은 사람에게 주어진 기능과 능력을 통하여 일하신다. 우리의 정력은 하나님과 협력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매 발걸음마다 열심히 기도하며 자아를 낮추는 일 없이는 승리를 얻을 수 없다.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능력에 억지로 협력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보다 백배나 더 큰 강도(强度)로 그대를 강요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대를 하늘에 적합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단의 요새는 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대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대의 목적과 욕망과 성향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킬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그대를 위하여 그 일을 이루어 주시돼 심지어 "모든 이론을 피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고린도후서 10장 5절) 하기까지 하실 것이다.


 143  그렇게 될 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빌립보서 2장 12, 13절) 신다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하늘나라의 영광에 매력을 느끼고 있지만, 그것을 소유하는 데 따르는 조건들을 만족시키려고 하지 아니한다. 넓은 길에는 그들이 걸어가는 길에 완전히 만족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죄악의 속박에서 빠져나오길 열망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죄악적 습관에 대항하고자 애쓴다. 그들은 좁은 길과 좁은 문을 바라보나, 이기적 쾌락과 세상에 대한 애착과 교만과 성화되지 못한 야망들이 그들과 구주 사이에 담이 된다. 자신의 의지와 자신이 택한 애정의 대상, 혹 직업을 버리는 것은 희생을 요구하나. 그들은 이 때문에 주저하고 망설이며 돌아선다.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하는 자가 많으리라"(누가복음 13장 24절). 그들은 선을 바라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어느 정도 노력을 하나 그것을 택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모든 희생하고라도 선을 얻으려는 확고한 목적이 있다. 우리가 이기고자 할 때, 남은 한 가지 희망은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과 합치시키고 날마다 시간마다 그분과 협력하여 일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살리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일을 통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교만과 자부심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요구된 대가를 즐겨 지불하고 있는가? 우리의 뜻을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시키고 있는가? 기꺼이 그렇게 하기 전에는 회개시키는 하나님의 은혜가 구리에게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144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은 믿음의 선한 싸움이다. 사도 바울은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 하노라"(골로새서 1장 29절)고 말하였다. 야곱은 그의 생애의 큰 위기에서 기도했다. 그는 오직 한 가지 목적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것은 품성의 변화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을 때 원수인 듯한 자의 손이 그에게 닿았으며, 그는 밤이 맞도록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씨름하였다. 그러나 그의 영혼의 목적은 생명 자체가 위기에 놓였을 때도 바뀌지 않았다. 그의 힘이 거의 소진해졌을 때, 천사가 하늘의 능력을 발휘했다. 그분이 야곱을 치자, 야곱은 자기와 싸우고 있는 분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상처를 입고 속절없는 상태로, 그는 구주의 품에 쓰러져 축복을 구하였다. 그는 조금도 비켜나지 않고 간구를 계속하였다. 마침내,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할 것이니라"(이사야 27장 5절)고 한 당신의 약속에 따라 이 무력하고 회개하는 자의 간구를 들어주셨다.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세기 32장 26절)고 하는 확고한 정신으로 간구하였다. 간구하였다. 이 끈질긴 정신은 그 부조와 더불어 씨름하신 분에 의하여 심어졌다. 그에게 승리를  주신 분은 바로 이분이었다. 그분께서는 또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고치시고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 이니라"(창세기 32장 28절)고 말씀하셨다. 야곱이 자신의 힘으로 헛되이 씨름하여 얻고자 한 것이 자아의 포기와 확고한 믿음을 통하여 얻어졌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한일서 5장 4절).


 14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마태복음 7장 15절).

 

거짓 교사들이 일어나 그대를 좁은 길과 좁은 문에서 떠나게 하고자 할 것이다. 그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있으나 속으로는 노략질하려는 이리이다. 예수께서는 거짓 교사와 참 교사를 구별할 수 있는 시금석을 주신다. 그분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들은 시험할 때 그들의 훌륭한 연설과 고상한 말로 하라는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을 받아야 한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이사야 8장 20절).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잠언 19장 27절). 이러한 교사들은 어떠한 기별을 전하는가? 그것이 그대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고 두려워하게 하는가? 그것은 그대로 하여금 그분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는 일을 통해 그분을 향한 그대의 사랑을 나타내게 하는가? 사람이 만일 도덕상 율법의 중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교훈을 경하게 여긴다면, 하나님의 계명 중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친다면, 하늘에 의해 존중히 여김을 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주장이 근거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흑암의 왕, 곧 하나님의 원수에게서 나온 일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고 그분의 휘장을 달고 있다고 해서 모두 그분의 백성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나의 이름으로 가르쳐 온 많은 사람들이 마침내 부족함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146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스스로 바르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를 그들의 주라고 주장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큰일을 하고 있노라고 공언하지만 그들은 죄악의 일꾼들이다.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에스겔 33장 31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그들에게 이런 사람과 같다. "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에스겔 33장 32절). 말로만 제자라고 하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 영혼을 구원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의하여 제시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믿어라, 믿어라, 그러나 율법을 지킬 필요는 없다"라고 말한다. 순종으로 이끌지 않는 믿음은 가정일 뿐이다. 사도 요한은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요한일서 2장 4절)다고 말한다. 특별한 섭리나 이적적 현상이, 하고 있는 사업이나 주장하는 이상이 진실성을 반드시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아무도 품지 못하게 하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하게 말하고 그들의 인상과 느낌과 행동을 거룩한 표준보다 높이 여길 때, 우리는 그들에게 빛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종은 제자가 되는 시금석이다. 우리가 사랑을 말할 때 이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받아들인 교리가 마음속에 있는 죄를 소멸시키고, 심령을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하고 성결의 열매를 맺으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진리임을 알 수 있다.


 147   자비, 친절, 긍휼, 동정이 생애에 나타날 때, 의로운 일을 하는 기쁨이 마음속에 있을 때, 그리스도를 높이고 자기를 죽일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바른 상태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한일서 2장 3절).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마태복음 7장 25절).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크게 감동되었다. 진리의 원칙들이 담고 있는 거룩한 미가 그들을 끌었으며, 그리스도의 엄숙한 경고가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그들에게 들렸다. 그분의 말씀이 그들이 전에 가졌던 사상과 견해의 뿌리가 뒤흔들었다. 바꿔 말해,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하려면 모든 사상과 행동의 습관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케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랍비들이 여러 세대 동안 지켜 온 습관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의 마음이 그분의 말씀에 반응을 나타내기는 하였으나, 그 말씀을 그들의 생애의 지침으로 받아들이고자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신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놀랍도록 생생하게 보여 주는 일례를 들면서 산상에서의 교훈을 마치셨다. 구주의 주변에 모여든 무리 가운데는 갈릴리 바다 부근에서 생애를 보낸 사람들이 많았다.


 148   그들은 산 중턱에 앉아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동안 계곡과 산 골짜기로 흐르는 시냇물이 바다를 찾아 흘러내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름에는 종종 이 시내들이 말라서 먼지가 나는 바닥만 남긴 채 완전히 없어져 버리곤 했다. 그러나 겨울의 폭풍우가 언덕 위에 쏟아지면 강은 맹렬하고 사나운 물결로 바뀌었는데, 때로는 골짜기를 가들 채우며 저항할 수 없는 거센 물살로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가끔은 얼른 보기에 위험이 없을 것 같은, 농부들이 초원에 지어 놓은 농막들도 휩쓸려 떠내려 갔다. 그런데 산 위 높은 곳에는 바위 위에 지은 집들이 있었다. 그 지역 어떤 곳에는 완전히 돌로 지은 집들도 있었다. 그중 많은 수가 폭풍우에 천 년을 견디어 왔다. 이 집들은 수고와 고생을 하며 지은 것들이었다. 이 집들은 접근하기가 쉽지 않고, 또 위치가 초원보다 인기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바위 위에 지어졌으므로 바람과 폭풍우가 몰아치고 홍수가 닥쳐도 이상이 없었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품성과 생애의 기초로 삼는 자는 반석 위에 이 집들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여러 세기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이사야 40장 8절)고 기록하였다. 베드로도 산상 설교가 있은 지 훨씬 후에 이사야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베드로전서 1장 25절)고 부언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이 알고 있는 하나밖에 없는 불변의 것이다. 그것은 확실한 기초이다. 예수께서는 "천지가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24장 35절)고 말씀하셨다.


 149   율법과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위대한 원리가 산상에서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누구든지 말씀 위에 집을 짓는 자는 그리스도 곧 만세 반석 위에 집을 짓고 있다.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들만이 그분 위에 집을 짓고 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린도전서 3장 11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장 12절), 말씀이시며 하나님의 계시이신, 다시 말해 그분의 품성과 그분의 율법과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생명의 현현이신 그리스도께서만이 우리가 영구적인 품성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기초가 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분 위에 집을 짓게 된다. 단순히 의를 증기는 자가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의를 행하는 자가 의로운 사람이다. 거룩하게 되는 것은 황홀경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친 결과이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이 가까운 곳에 장막을 쳤을 때 가나안에 대한 지식을 갖거나 가나안의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는 그 좋은 땅의 포도원과 감람나무 수풀이 그들의 소유로 주어질 수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순종하는 가운데 그 땅을 점령함으로써, 조건에 응함으로써, 하나님을 믿는 산 믿음을 활용함으로써, 그분의 약속을 그들의 것으로 삼음으로써 이 를 실제로 그들의 소유로 만들 수 있었다. 신앙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은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가 그분의 사랑의 선물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원의 근거를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라 의로운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 믿음에 두신다. 단순히 말만 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기대되고 있다. 품성은 행동을 통하여 형성된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장 4절).


 150  하나님의 자녀란 단순히 마음으로만 성령에 위해 감동을 받거나 가끔 그 능력에 굴복하는 자들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자들이다. 그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만 어떻게 시작할지 모르고 있는가? 그대는 암흑 가운데서 빛을 어떻게 찾을지 모르고 있는가? 그대가 가지고 있는 빛을 따르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에 순종하려는 마음을 가지라.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생명은 그분의 말씀 가운데 있다. 그대가 믿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것은 순종할 능력을 주게 될 것이다. 그대가 소유하고 있는 빛에 유의할 때, 더 큰 빛이 오게 될 것이다. 그대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집을 짓고 있으므로 품성이 그리스도의 품성과 같은 모습으로 형성될 것이다. 참된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는 산 돌이시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분 위에 집을 짓는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진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베드로전서 2장 5절).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에베소서 2장 21절) 간다. 돌들이 기초와 하나가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의 공통적인 생명이 모든 사람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어떤 푹 풍도 그 건물을 무너뜨릴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으면 모두가 그분과 함께 사시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은 전부 무너질 것이다.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인간적인 사상과 견해, 인간이 고안한 형식과 의식의 기초 위에 혹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상관없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어떤 활동 위에 집을 짓는 자는 품성의 집을 흐르는 모래 위에 세우고 있는 것과 같다. 맹렬한 유혹의 폭풍우가 모래로 된 기초를 휩쓸고 그의 집을 세월의 해변에 하나의 난파선으로 남게 할 것이다.


 151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공평으로 줄을                                          

삼고 의로 물이 그 숨는 곳에 넘칠 것인즉"(이사야 28장 16, 17절).

 

그러나 오늘날 자비는 죄인들에게 호소한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 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에스겔 33장 12절). 오늘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발하는 음성은 주께서 사랑하는 성을 바라보실 때 마음의 고통을 안고 부르짖으시던 그 음성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누가복음 13장 34, 35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당신의 은혜를 거절하고 멸시한 세상의 표상을 보셨다. 아, 완고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여! 그분께서는 그대들을 위하여 울고 계셨다. 예수께서 산 위에서 눈물을 흘리고 계시던 당시만 해도 예루살렘은 회개하고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다. 하늘의 선물은 그리스도께서는 잠시 동안이나마 그때까지도 예루살렘이 당신을 받아들이길 기다리셨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사랑의 음성으로 그대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장 20절).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장 2절). 자신에게 소망을 두고 있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절박한 멸망을 피하는 데에는 아직도 영영 늦은 것은 아니다. 폭풍우가 몰려오기 전에, 확실한 기초로 피신하라.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 28장 16절).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이사야 45장 22절). "두려워 말라 내가 노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장 10절). "영세에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5장 17절).

 

 원저자 : 엘렌 G. 화잇 

 발행처 : 시 조사 

 

www.hanwanso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