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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리/초기문집

초기문집 3 영적 선물 // 서 론

by 동심초(남양주) 2022. 3. 16.

  서 론  

                              장백패랭이 

 

 

    서  론      

 

 133  예언의 선물은 유대인의 시대 동안 교회에 나타났다. 그 선물은 그 시대가 끝나 갈 무렵 교회의 상태에 연고로 수 세기 동안 사라졌다가 메시아의 초림 직전에 다시 나타났다. 침례자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였다.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서 예수에 대하여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예언하였다. 여선지자 안나는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분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리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이스라엘에게 소개하도록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선지자는 없었다. 기독교 시대는 성령의 부어 주심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매우 다양한 영적 은사들이 신자들 가운데 나타났다. 이것들이 매우 풍성하였으므로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적용하듯이 이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가 아니라 교회 내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큰 배도 이래로 이 은사들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이 필시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초대 교회에 국한되었다고 믿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은사들이 그친 것은 교회의 불신과 오류들 때문이 아닌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선포함으로써 확실히 그렇게 할 것인가, 초대 교회  당시의 믿음과 활동을 회복한다면, "늦은비"가 그 은사들을 다시 불러일으키지 않겠는가? 이렇게 유추해 보면 우리는 분명히 그렇게 기대할 수 있다.

 

 134  유대인 시대의 배도들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특별한 나타남으로 열리고 또 닫혔다. 기독교 시대-이전 시대와 비교할 때 그 시대의 빛이 마치 달의 희미한 과언과 비교된 태양빛과 같은 -가 영광 가운데 시작하여 조용히 종결되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리고 영의 특별한 역사가 그리스도의 초림을 위하여 한 백성을 준비시키는 데 필요했으므로, 재림을 위하여는 얼마나 더욱 그러하겠는가? 특히 마지막 시대는 전대미문의 위험한 때가 될 것이며, 거짓 선지자들이 큰 기사와 이적을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성경에도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침례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5~18). 켐프 벨 역은 "이런 기적적인 능력들이 신자들에게 동반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러한 선물들은 사도들에게 국한되지 않고 신자들에게도 주어졌다. 누가 그것들을 얻을 것인가? 모든 믿는 자들이 얻을 것이다. 얼마 동안 가질 것인가? 아무런 시간의 제한이 없다. 이 약속은 복음을 전파하라는 대사면 위임과 나란히 가며, 마지막 신자에게까지 미친다. 그러나 이 도움을 사도들과 그들의 전도를 통하여 믿은 자들에게만 약속되었으며, 그들이 그 사명을 성취하고 복음을 확립시켰으며, 그러므로 그 선물들은 그 세대와 함께 그쳤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135  저 위대한 사명 위임이 그 세대와 더불어 종결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이 위대한 사명 위임 아래서 복음 전파가 초대 교회와 더불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으로 미루어볼 때 분명해 보인다. 그분은 나는 너희 사도들과 어디서나, 세상 끈에서도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시대란 유대인의 시대를 의미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데, 이는 그 시대는 십자가에서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초대 교회의 복음의 전파와 믿음에는 동일한 영적 도움이 항상 동반될 것이라는 믿는다. 사도들의 위임받은 사명은 기독교 시대에 속했으며, 모든 기독교 시대를 포괄한다. 따라서 그 은사들은 오로지 배도를 통해서 잃어버린 바 되었으며, 초기의 신앙과 실행의 부활과 더불어 다시 재현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 내의 특정의 영적 은사들을 두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분이 그 은사들을 철회하셨거나 폐하셨다는 아무런 성경상 증거가 없는 이상 우리는 그것들이 폐지되었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유대인의 안식일이 폐지되었으며,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 제정되었다고 기록된 동일한 장(章)-불법의 비밀과 죄악의 사람의 행적(行績)이란 책의 한 장-에 있다.


 136  그러나 반대자들은 그 은사들이 그쳤다는 성경적 증거는 다음의 구절이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사랑은 언지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나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고전 13:8~13). 이 본문은 영적 은사들 뿐 아니라 믿음과 소망도 그칠 것을 예언한다. 그러나 언제 그것들이 그치기로 되어 있었는가? 우리는 아직도 "소망이 훌륭한 결실로, 믿음이 눈으로 보는 것으로 그리고 기도가 찬양으로 바뀔" 때를 고대하고 있다. 그것들은 온전한 것이 올 때에, 우리가 더 이상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보지 않고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때에 그칠 것이다. 의인들이 완전하게 되고 그들이 보았던 것처럼 보게 될 그 완전한 날을 아직 이르러 오지 않았다. 그 죄악의 사람은 성년기에 도달했을 때 예언, 방언 그리고 지식 같은 "어린아이의 일"과 그리고 초대 그리스도인의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도 던져 버린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의 믿음과 소망이 완성될 때까지, 불멸의 상태에 놀라운 영광이 죽을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 나타난 영적 능력과 지식에 대한 가장 찬란한 전시들을 무색하게 만들 때까지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두셨던 영적 선물을 그분이 취해 갈 계획이셨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이 본문 가운데 전혀 없다. 어떤 사람들이 심각하게 제시한 바 있는,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근거한 반대 이론은 그저 잠시 언급하고 넘어갈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 성경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고 기록했을 때 바울이 그 구절을 영감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쓰일 것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말했다면, 왜 그는 그 순간에 그 성경에다 추가하고 있었는가? 적어도 그 문장을 끝내자마자 펜을 놓았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사도 요한은 왜 30년 후에 계시록을 기록하였는가?


 137  이 책에는 영적인 은사들의 폐지를 입증하기 위하여 인용되는 또 다른 구절이 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이 성경절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고, 복음 시대의 초기에 예수님과 그분의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그 후부터는 그러한 방법으로 인간에게 말씀하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 날짜 이후의 모든 예언은 거짓임에 틀림없다. 이것으로 영감의 정경이 종결되었다고 들 한다. 만일 그렇다면 왜 요한이 밧모섬에서 에베소에 돌아온 후에 그의 복음서를 썼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밧모섬에서 기록한 저 책의 예언의 말씀에 보태지 않았는가? 그 본문을 통하여 살펴볼 때, 더하거나 제하여 버리지 말라는 경고는 편찬된 책으로서의 성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도의 손에서 나온 계시록 책만을 가리키는 것임을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어느 다른 책에 더하거나 거기서 제하여 버릴 권세를 갖고 있지 않다. 계시록을 기록할 때 요한이 다니엘의 예언의 어떤 것을 덧붙였는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개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꿀 권한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요한의 이상들은 다니엘의 그것들을 확증해 주고, 거기 소개된 주제들에 많은 부가적인 빛을 비춰 준다. 나는 하나님께서는 침묵을 지키시겠다고 자신을 묶어 놓지 않으시고 여전히 말할 자유를 갖고 계신다고 결론을 내린다. "주여, 당신께서 누구를 통하여 말씀하기를 원하든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는 것이 항상 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이 되었으면 좋겠다.


 138  그와 같이 영적 은사의 폐지를 성경을 입증하려는 사도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지상에 한 백성을 갖고 계시기에, 우리는 셋째 천사의 비결, 교회를 사도 시대의 토대로 다시 돌아가게 하고 그것을 참으로 세상의 빛-어둠이 아니라-으로 만들어 줄 기별과 관련된 은사들이 나타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 기별은 교회를 세울 것이며 그것을 어두움이 아닌 진정한 빛이 되게 할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는 마지막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을 것에 대하여 미리 경고를 받았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해 낼 수 있도록 그들의 가르침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을 준다. 최고의 시금석은 하나님의 율법으로서, 그것은 예언하는 행위와 그 선자자들의 도덕성 성격, 둘 모두에 적용된다. 마지막 시대에 아무런 참된 예언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면, 마치 거짓 선지자뿐 아니라 참 선지자도 있는 양 그들을 시험할 수 있는 시금석을 주기보다는 (선지자가 없는) 사실을 진술하고 그렇게 하여 속임을 당할 모든 기회를 없애 버리는 것이 얼마나 더 쉬웠겠는가. 이사야서 8장 19~20절에는 현시대의 속살거리는 영들에 대한 예언이 있으며, 율법이 시금석으로 제시되어 있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 리라. "만일 어떤 참된 영적 나타남도 혹은 예언하는 일도 아울러 없을 것이었다고 한다면, 왜 "그들의 말하는 바가"라고 하였을까?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말씀하신다(마 7:15~16). 이것은 산상 설교 중의 일부로서, 모든 사람은 이 담론이 복음 시대 전체의 교회에 전반적으로 적용이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의 도덕적인 성품으로써 알 수 있다. 그들의 열매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판가름할 수 있는 유일한 표준은 하나님의 율법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율법과 증거의 말씀으로 인도된다. 참 선지자 들은 이 말씀에 일치되게 말할 뿐 아니라 그것에 부합되게 살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사는 사람을 나는 감히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평화의 이상(異像) 들을 보는 것이 항상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이었다.


 139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말할 때 갑작스러운 멸망이 그들에게 닥친다. 참 선지자 들은 담대하게 죄를 견책하며 다가오는 진노에 대해 경고할 것이다. 말씀의 분명하고 명확한 선언에 배치되는 예언들은 배척되어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도 그분의 재림의 광경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경고하실 때 그같이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보는 데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 그들이 그분이 올라가시는 것을 본 동일한 방식으로 오실 것이라고 천사들이 매우 분명하게 확인했다. 그런 까닭에, 마지막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의 일에 대하여 예언하시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 이 점에 관한 모든 참된 예언으로 그분이 하늘로부터 눈으로 볼 수 있게 오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때에 참 선지자가 전혀 없을 것이라면, 왜 예수께서 그때에 모든 예언하는 일을 배척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까지 이르리니"(엡 4:11~13). 우리는 이 성경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사람들에게 선물을 혹은 은사들을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은사들 중에는 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사와 교사가 열거되어 있다. 그것들이 주어진 목적은 연합과 지식에 있어서 성도들을 온전케 하기 위함이다. 


 140  오늘날 목사와 교사라고 공언하는 자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 은사들이 약 일천팔백 년 전에 그들의 목적을 성취했으며, 따라서 끝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왜 목사나 교사라는 직함을 던져 버리진 않는가? 이 본문에 의거하여 선지자의 직무가 초대 교회에만 국한되었다고 한다면, 전도자의 직무도 그럴 것이며 나머지 모든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는 아무런 구별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이 요점에 관하여 잠깐 추론해 보도록 하자. 이 모든 은사는 연합, 지식 그리고 정신에 있어서 성도들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주어졌다. 이러한 영향 아래서 초대 교회는 한동안 저 연합을 누렸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 한뜻이 돼"었다. 그리고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은 것은 이 같은 연합의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행 4:31~33). 지금 이와 같은 일들의 상태가 얼마나 바람직해 보이는가! 그러나 그 분열시키고 망치는 영향을 지닌 배도가 '아름다운' 교회의 아름다움을 훼손하고 베옷을 입혔다. 분열과 무질서가 그 결과였다. 오늘날처럼 기독교계에 이처럼 다양한 종파가 있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초대 교회의 연합을 유지하는 데 은사들이 필요했다고 한다면, 연합을 회복시켜야 할 지금에는 얼마나 더 그러하겠는가! 그리고 마지막 시대에 교회의 연합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은 예언들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는 주님께서 시온을 다시 데려오실 때 파수꾼들이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이라는 보증을 갖고 있다. 또한 마지막 때에 지혜 있는 자들은 그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일이 성취될 때 하나님께서 지혜롭다고 간주하시는 모든 자와의 믿음의 연합이 있을 것이다. 이는 사실상 바르게 이해하는 자들은 반드시 비슷하게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주어진 그 은사들을 제외시킨다면 무엇으로 이러한 연합을 이룰 수 있겠는가?


 141  이런 고찰들을 통하여, 여기 예언된 교회의 완전한 상태는 미래에 일어날 일임이 확실하다. 따라서 이 은사들은 아직 그 목적을 이루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이 편지는 바울이 자신은 제물로 드려질 준비가 되었으며, 그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다고 디모데에게 말하기 약 2년 전인 서기 64년에 기록되었다. 배도의 씨앗들이 교회 내에서 이제 움트기 시작했는데, 이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보낸 그의 둘째 서한에서 10년 전에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사나운 이리가 들어와서 양을 아끼지 않을 태세였다. 그 교회는 그 본문이 고찰하였던 연합 안에서의 저 완전을 향하여 일어서서 나아가지 않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썼을 때, 바울은 큰 배도를 넘어서 하나님의 남은 무리가 모일 시기를 바라보았음이 틀림없다(엡 4:13). 그런 까닭에 교외 안에 주어졌던 이 은사들은 아직 그 기한을 다 마치지 못한 것이다.


 142  "성령을 소멸치 말며 멸시 키 말고 범사에 좋은 것을 취하… 라"(살전 5:19~21). 이 서신에서 그 사도는 주님의 재림이란 주제를 소개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때에 주의 날이 그들에게 닥쳐오고 갑작스러운 멸망이 밤중에 도둑이 오는 것처럼 그들에게 닥쳐올 그때에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말하는 믿지 않는 세상의 상태를 묘사한다. 그다음에 그는 이런 일들에 비추어 깨어 경계하고 근신해야 할 것을 교회에 권한다. 이어지는 권면 가운데 우리가 인용했던 "성령을 소멸치 말며…" 등등 말이 들어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세 구절의 의미상으로 각각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그 나열되어 있는 순서대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성령을 소멸하는 사람은 적법한 성령의 열매인 예언하는 일들을 멸시하도록 버려질 것이다.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거이며"(욜 2:28). "범사에 헤아려"라는 표현은 그 담론의 주제인 예언하는 일들에 국한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 가운데 주신 시금석들로 그 영들을 시험해야 한다. 오늘날 영적 기만과 거짓 예언들이 범람하고 있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이 본문은 여기에 특별히 적용된다. 그러나 그 사도가 "모든 것을 다 배척하라"라고 말하지 않고, 범사에 헤아리라고 (모든 것들을 입증해 보고) 말하고, 좋은 것을 굳게 붙잡으라고 말한 것을 주목하라.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28~32). 말세에 성령이 부어짐에 대해 말하고 있는 요엘서의 이 예언은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초기에 모두 성취되지는 않았다. 이 사실은 이 인용절에 소개된 대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전조가 될 것이었던 하늘과 땅에서 베푸실 이적이란 표현으로 분명해 보인다. 우리가 그 이적들을 보았긴 했지만, 그 두려운 날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 온 복음 시대를 마지막 때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마지막 때가 지나간 1,800년 전체라고 말하는 것을 어리석다. 그 마지막 때는 주님의 날까지 그리고 하나님의 남은 백성이 구원받을 때까지 미친다. 이는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43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을 도래케 하는 기사와 이적들이 베풀어지는 와중에 존재하는 이 남은 무리는 요한 계시록 12장 17절에 언급된 여자의 후손의 남은 자손- 지상의 교회의 마지막 세대-임에 틀림없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복음 교회의 남은 무리는 그 은사들을 받을 것이다. 그들에 대항하여 싸움이 벌어질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졌기 때문이다(계 12:17). 요한계시록 19장 10절에서,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으로 정의되어 있다. 그 천사는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함께 된 종이니라"라고 말했다. 요한계시록 22장 9절에서 그는 사실상 같은 내용을 아래와 같이 반복한다.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이 두 구절을 비교하여 볼 때 우리는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증거는 저 한 성령의 모든 은사를 포함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고전 1:4~7). 그리스도의 증거가 고린도 교회 안에 견고케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그들이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남은 무리가 예수의 증거를 완전히 확신하게 될 때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될 것이라고 우리가 결론을 내려도 타당하지 않겠는가?          R.F. 코트렐

 

저 자 : 엘렌 G. 화잇

출 판 : 시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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