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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리/바울의 생애

바울의 생애 // 15. 고린도에서의 바울

by 동심초(남양주) 2022. 4. 7.

 15, 고린도에서의 바울 

 제주도에서 

 

 

 고린도에서의 바울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 체류 후반에 기록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고린도에 있는 신자들에게 깊은 관심과 끈기 있는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가 뿌린 좋은 씨앗은 풍성한 수확을 약속했으나, 원수는 밀과 함께 가라지를 섞어 뿌려서, 이것들이 자라서 악한 열매를 맺으려 하고 있었다. 바울이 없는 동안 고린도 교회에 가혹한 시련이 왔다. 그들은 가장 음란하고 유혹적인 상황 아래서 우상 숭배와 관능 주의에 둘러싸여 있었다. 바울이 그곳에 있는 동안에는 크게 영향이 없었다. 그의 굳건한 믿음, 열렬한 기도, 교훈의 말씀, 무엇보다도 그의 모범이 감동과 격려가 되어 그들은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당하기로 선택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나자, 타고난 구미와 경향이 다시 세력을 떨쳤다. 생활의 습관을 극복하는 것은 하루아침 교육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하나씩 하나씩, 많은 사람이 믿음을 떠났다. 삼 년이나 하늘로 향하도록 독촉하던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모세가 구름 속에 들어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을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들도 앉아서 먹고 마시고 방탕했다. 마치 하늘의 기별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것처럼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타락에 빠지거나 이교로 돌아가 버렸다. 어떤 사람은 은밀하게, 또 다른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악을 행하고 허세를 부리고, 성경을 곡해해서 자신들의 입장을 변명하려고 했다. 교회가 여러 문제들에 관하여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바울에게 보냈는데, 그들 중에 있는 통탄할 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회의 참상태가 감추어졌으나, 이 편지는 발신자들이 자신들의 목적에 이롭도록 해석할 수 있는 설명을 그에게서 받아 내려는 의도라는 것을 바울은 성령을 통하여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 무렵에 고린도에서 명성이 높은 그리스도인 가정인 글로에 집안사람들이 에베소에 왔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쪽 형편에 관하여 물었고, 그들은 교회가 분열되었다고 대답했다. 아볼로가 방문했을 때 막연했던 분쟁이 더 커졌다. 거짓 교사들은 바울의 교훈을 멸시하도록 신자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복음의 교리와 의식들이 곡해되었다. 한때, 그리스도인 생활에 열심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서 교만과 우상 숭배와 호색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바울이 가장 염려했던 일이 생각보다 컸다. 드러난 상황을 보면서 두려움이 가득 찼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일 때문에  그의 사업이 실패했다는 생각에 빠지지 않았다. 마음에 격통을 느끼며, 앞을 가릴 수 없는 눈물로 하나님께 조언을 구하고, 그의 계획을 추진하고 싶었다. 즉시 고린도를 방문하는 것은 포기가 되어 있지 않았다. 보고된 대로라면 교회의 상태가 그의 노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디도를 고린도에 보내 그들의 악을 고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그의 달라진 계획을 알려 주었다. 그런 다음 사도는 그가 받은 배은망덕에 대한 분노에 숨이 막히면서도, 그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면서 모든 용기를 모아 그의 편지 가운데서 가장 귀중하고, 가장 교훈적이며, 가장 힘 있는 편지를 그의 충실한 소스데네에게 받아쓰도록 하여 고린도 교회에 보냈다. 바울은 교회가 제시한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해 아주 명료하고 활달하게 대답하고, 만일 그것이 유의한다면 그들을 보다 높은 영적 단계로 인도할 일반적인 원칙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의 편지는 오래 연구해서 쓴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매끈한 말로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충실하게 그들의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고, 그들의 죄악에 대하여 책망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다시 지적하고, 그들 이 처음에 나타냈던 헌신의 열성을 새롭게 불 붙이려고 노력했다. 고린도 신자들에게 부드러운 인사를 전한 다음, 자신의 수고를 통해 우상 숭배에서 돌이켜 참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겼던 그들의 경험을 언급했다. 그들이 받았던 성령의 선물을 생각나게 했고, 그리스도의 순결과 거룩함을 얻을 때까지 그리스도인의 생애에서 계속적인 향상을 하는 일이 그들의 특권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이렇게 길을 준비한 다음 분명하게 그들 가운데 있는 불화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러고는 그리스도의 권위로 그들에게 다툼을 그치고 그리스도의 연합과 사랑을 구하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는 교회 안의 분쟁에 대해서 누가 어떻게 알려 주었는지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고전 1:11). 바울이 비록 영감을 받은 사도였지만, 주께서 항상 백성들의 상황에 알려 주시는 것은 아니었다. 교회의 번영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죄악이 스며드는 것을 본 사람들이 그 사실을 사도에게 알렸고, 그가 이미 받은 빛을 통해서 이런 일이 발전하는 데 따라 어떻게 판단할지 준비를 했다. 주께서 그 특별한 때를 위하여 그에게 새로운 계시를 주시지 않았지만, 참된 빛을 찾고 있던 사람들은 바울의 기별을 그리스도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참으로 빛을 구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평범한 편지로 여길 수 없었다. 주께서는 교회들 가운데 일어난 곤란과 위험을 그에게 보이셨고, 이런 것들이 발전해 나갈 때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지 깨닫게 되었다.

 

그는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사람이었다. 그는 영혼들에게 대해 하나님께 보고해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돌보아야 했다. 그렇다면 그들 중에 일어난 무질서와 분쟁에 관한 보고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하고도 옳은 일이 아니었을까?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보낸 견책은 그의 다른 편지들에서처럼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 분명했다. 사도는 그의 수고의 결실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거짓 교사들에게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 있는 무지와 분쟁 때문에 어떤 이들이 진리에서 완전히 떠날까 염려해서 그런 것을 언급하여 그들을 자극하는 일을 삼갔다. 그들 가운데서 행한 자신의 사업에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0~11)고 말했다. 바울은 믿음의 용사 답게 자신의 사업의 성격을 성격을 설명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터를 닦아 두고 다른 사람이 그 위에 설 수 있게 하는 지혜로운 건축자(고전 3:10)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자신을 높이지 않았다. 그는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고 선언했다. 자신의 지혜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만이 그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대로 진리를 전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동역자로서 그의 증거에 마음을 여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업으로부터 영적 진리를 부지런히 가져오는 일꾼이었다. 바울은 모든 교사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모든 계급의 필요에 응하고, 어느 때나 어느 

 

장소에서나 어떠한 환경 아래서도 적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로운 교훈을 전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면서도 그는 어떤 영광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들린 겸손한 일꾼이 되었다. 주께서는 바울에게 건축을 설계하는 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기초를 놓게 하셨다. 이렇게 성전을 세우는 일은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강력한 예로서 성경에 자주 언급되었다. 스가랴는 그리스도를 여호와의 성전을 지을 가지라고 언급한다. 그는 이방인들이 사업을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먼 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이사야는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라고 언급한다(슥 6:12, 15, 사 60:10). 그리고 고린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10~13). 어떤 목사들은 자신의 수고를 통해 금이나 은, 보석 등 고귀한 물질을 사업에 바쳤는데 이것들은 도덕적 가치를 대표하는 것들이다. 진품처럼 반짝이지만 거짓 물질은 육적인 마음과 성화되지 못한 품성을 말하며, 의로운 것처럼 보이도록 광택을 내지만 인간의 눈으로는 구별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밝혀내실 것이다. 보석은 하나님의 은혜로 깎이고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인을 나타낸다. 자기희생으로 장식되고 고상하게 되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계 3:12). 세상적인 견해로 보면 많은 사람이 자신의 노력으로 연마된 보석이 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그들은 산돌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된 기초 위에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날에 그들의 참된 모습이 드러날 것인데, 단지 나무나 검불, 그루터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아데미의 신전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 웅장하던 모습은 깡그리 사라졌다. "크도다 에베소의 아데미여"라고 외치던 사람들이나 여신들이 봉안되었던 신전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의 종교는 잊혔고, 이제는 헛된 이야기로나 남아 있다. 그 신전은 거짓 기초 위에 세워졌고, 시험을 당했을 때 무가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바울이 에베소에서 채석한 돌들은 고귀한 것이요, 오래 견디는 것이다. 바울 자신은 참된 기초 위에 세워졌고, 가져온 모든 돌은 크건 작건, 연마되었건 떠낸 그대로 건, 평범하거나 특별하거나 간에 모두 산 기초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점점 하나님의 성전으로 쌓아 올라갔다. 사도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을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고 말한다. 바울은 계시 가운데서 하나님의 도성과 그 기초를 보았다.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을 금, 은, 귀한 보석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의 사업을 극도로 어렵게 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이라고 주장하면서, 자기들만 오직 합법적인 하나님의 집의 돌이라고 하였다.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참된 기초 앞에 나올 때 유대인들은 이 재료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움츠리지 않고 그의 사업을 추진했다. 바울과 그의 동료 일꾼들은 유능한 건축가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업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세웠을 뿐 아니라 허물기도 했다.

그들은 편협한 신앙과 편견, 거짓 기초 위에 세워진 인간의 폭력과 싸워야 했다.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사도들은 원수들의 이런 성채들을 무너뜨렸다. 그리스도 교회의 건축자로 일한 많은 사람이 느헤미야 시대의 성벽을 건축하던 사람들과 같았다.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느 4:17)다. 훌륭한 건축자들이 차례로 원수의 손에 쓰러졌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고, 야고보는 칼에 찔려 죽었으며, 바울은 참수를 당했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요한은 유배를 가야 했다. 그러나 건물에는 돌에 돌이 첩 놓이게 되고, 교회를 가혹하게 핍박하는 가운데서도 넘어진 사람들을 대신해 새로운 일꾼들이 그 자리에 들어서서, 하나님의 교회라는 성전은 지속적으로 지어져 올라갔다. 이 충실한 건축자들은 부지런히 재료를 살아 있는 기초 위에 가져왔다. 바울은 그의 마음과 품성이 하나님의 율법과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고의 회심자들에게도 같은 결과가 오기를 구했다. 그는 디모데에게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딤전 4:16) 보라고 당부했다. 이것이 성경 진리를 가르치는 모든 교사의 의무이다. 자신의 삶으로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설명하며, 마음을 순결하게 하고, 거룩한 대화를 하며, 선하게 되며, 선한 일을 행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뛰어난 재주나 가장 훌륭한 봉사라도 그것이 산 기초에 서 있지 않고, 그것과 연결되어있지 않으면 받아 주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오직 이것만이 우리의 재주에 참된 가치를 부여하며, 수고가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사가 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러 세기를 두고 해고해 보면 오류와 미신의 암흑 속에서 빛을 분출하는 산 보석들을 볼 수 있다. 이 보석들은 영원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증명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한 자들의 이름은 하늘의 천사들 사이에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게 될 것이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 그들을 무덤에서 불러내실 때 빛나는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 광택을 낸 보석들의 번쩍이는 빛은 그리스도의 성전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으로, 세월을 두고 세상을 극도로 거슬리게 했다. 왜냐하면 그 주변에 두른 어둠 속에서 찬란하게 비추어, 의와 죄 사이에 강력한 대조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진리의 금과 오류와 전통의 찌꺼기 사이에는 현저한 대조를 보여 준다. 스스로 진리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남들이 순종하는 꼴을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충성스럽게 산다는 것은 불신과 불순종에 대해 끊임없는 견책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전의 기초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롬 9:33)이 되신다. 그 머릿돌이 "사람들에게는 싫어 버림을 당한" 것이었지만 "하나님께는 택함을 입어 귀하게 돼"었다. 유대인 건축자들로부터는 거절을 당하셨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건축은 중단되지 않았다. 그는 하늘에서는 영광을 받으셨고, 땅에서는 충성스러운 자들에게 참된 기초가 되셨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교회를 부패시켜 온 오류에 의해서 그들의 수고가 항상 방해를 받아 왔다. 육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어리석음과 미신을 희석시키기 위해서 씨름해 왔다.

 

그 무오의 말씀은 기초를 놓기 위해 가져온 모든 재료를 시험하는 시금석인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교회의 성전을 열성적인 건축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그것을 무시해 버렸다. 그리하여 나무나 풀, 그루터기들이 조심성 없는 건축자들에 의해서 마치 고귀한 물건이나 되는 것처럼 그 위에 놓이게 되었다. 황제와 왕들과 법왕들, 제사장들은 신성을 모독하는 우상 숭배와 신실한 자들을 핍박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파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은 단  한순간도 그분의 성전과 일꾼들에게서 떠난 적이 없다. 투옥과 고문과 죽음이 그 일을 멈추게 하려고 했지만, 충실한 사람들은 사업을 진전시켰기 때문에 성전 건물은 아름답고 균형 있게 건축되었다. 때때로 일꾼들은 밀실과 암흑 속에서 저희 주위에 둘러 있는 미신의 안개로 거의 눈이 멀게 될 때도 있었다. 때때로 대적들의 폭행에 거의 압도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느헤미야와 그의 동역자들처럼 흔들리지 않는 신앙과 충실한 용기로 그들은 사업에 전념했다. 바울이 기초석 위에 성전이 세워지는 모습을 예로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종들이 세상 끝까지 일하는 것은 나타낸다. 하나님의 위해서 건축하는 모든 사람에게 사도와 격려와 경고의 기별을 전한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새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4~15). 진리의 말씀을 성실하게 전하는 그리스도인 교사들이 그의 회심자들의 마음과 생활을 전하는 길로 인도하는 것은 고귀한 재료를 그 기초 위에 가져오는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지혜로운 건축자로 영예를 받을 것이다. 순전한 그대로의 진리를 전하는 일을 무시한 자들은 마음과 생활이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을 거두게 될 것이다. 그들은 시험을 견디지 못할 재료를 가져오고 있다.


하나님의 날에 그는 해를 받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오류를 가르치는 일로 보낼지라도 회개와 믿음을 가지면 마지막에 구원을 얻을 것이나, 그들의 한 일은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들의 인생은 마땅히 얻을 수도 있는 좋은 열매를 얻지 못하게 된다. 멸망으로 빠져갈 뻔했던 영혼들이 진리를 충실하게 전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람은 세우는 일에 조심하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 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고 전했다. 바울은 고린도 형제들이 이기적인 야망에 빠져 있고, 참을성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를 바랐다. 그들에게 자신이 행한 과정을 소개한 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죄된 행위를 대조해 보기를 바라서였다. 그는 각 나라, 각 방언, 각 백성을 위해 일하면서 그들의 배경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려고 했다. 그들과 자신 사이에 대단한 차이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제쳐 두고 그가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편견을 이겨 내기 위해서 애를 썼다. 회심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위해 일하면서, 그는 그들을 위험한 이단으로 여긴다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전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이 수긍하는 교리에서부터 시작했다. 모세와 선지자로부터 시작해서 한 부분 한 부분 성경을 성경과 비교하고 예언이 성취된 것을 살펴보면서 메시아가 와야 하며, 또 어떻게 오실 것인가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가  오신 목적에 대해서 분명하게 전하고, 그가 땅 위에서 무엇을 하실 것이며, 어떤 대접을 받을 것인가를 제시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한 후에 메시아가 진실로 여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명백한 복음을 전했다. 바울은 이것이 바로 그가 하는 일이며, 이것을 기묘한 방법으로 얻었다는 것도 설명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의 편견을 진정시키고 진리로 영혼을 인도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의식법이 더 이상 힘을 잃었다고 강조하는 일도 자제했다. 그는 디모데에게 사업에 장애가 되는 것이면 어떤 것이라도 버리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들의 규칙과 의식들이 이방인들에 대한 사명과 일치되는 한 조정을 했다. 그는 유대인들을 오도하지도, 속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진리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감정을 유보했다. 이방인들을 위해서 일하는 방법은 또 달랐다. 그는 단순하게 유대의 희생 제물과 의식은 더 이상 준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설교했다. 사도는 그의 사업을 수행하는 중에 의식적 규칙과  함께 도덕적 율법도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부류와 만났다. 십계명을 그들 앞에 생명의 규칙으로 제시하면서 그것을 옹호했다. 그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그 율법을 순종해야 할 엄숙한 의무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그 율법을 범한 결과에서 사람을 자유롭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것은 오직 그들의 과거의 범죄를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가납 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믿음이 약한 자나 이해력이 둔한 사람들의 양심에 가책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의 지식의 우월함을 자랑하거나, 그들의 무식에 대해서 경멸하지도 않았다.


가능한 대로 자신을 그들의 위치에 두고 그들에게 동정과 사랑을 나타냈다. 그래서 그들로 더욱 고상하고 향상된 견해를 갖도록 인도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도니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 9:22). 유쾌함과 그리스도인의 예의를 갖춘 참을성 있는 친절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으며, 그들의 편견을 잠재우고, 그들의 경쟁심을 부추기지 않고,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애를 썼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했기 때문이었고, 구원을 받도록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서였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확고한 자제와 엄격한 절제와 지치지 않는 열심의 중요성을 고린도 신자들의 마음에 생생하게 감명시켜 주기 위하여 애를 썼다.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의 싸움을 고린도 가까이에 열렸던 경기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거기에는 언제나 엄청난 관중이 참석하고 있었다. 이런 예증은 그의 청중들에게 보다 생생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 계획된 것이었고, 또한 그들에게 매우 친숙한 것이었다. 헬라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에 오락을 위해 여러 종류의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또한 이것은 젊은이들이 전쟁터에서 싸우는 데 활기를 주고, 맹렬히 활약하도록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것은 정한 시간에 전해진 장소에서 화려하게 거행되었다. 왕과 귀족들과 정치가들이 애호하는 것이기도 했다. 신분이 높고 부요한 청년들이 경주에 가담했고, 그들은 상을 얻기에 필요한 모든 노력과 훈련을 아끼지 않고 연습했다. 이 경기들은 엄격한 규칙들로 통제되었는데 그것에 대해 항의할 수도 없었다. 상을 얻기 위하여 선수로 이름을 등록하려는 사람은 먼저 엄격한 준비 훈련을 받아야 했다. 해로운 식욕이 방종이나 지적 혹은 육체적 활력을 저하시킬 만한 어떤 일이라도 엄격히 금지되었다.

 

근육이 강인하고 유연해야 했다. 대단한 체력과 속도를 시험하는 시련을 통과하려면 모든 신경이 잘 통제되어야 하고, 모든 동작은 분명하게 하며, 매 발걸음은 신속하고 빗나가지 말아야 하며, 체력은 최고의 수준에 도달해야 했다. 경주자들이 기다리는 군중들 앞에 나타나면 그들의 이름이 공고되고, 경기 규칙을 분명하게 설명했다. 상품이 경주자들 앞에 잘 보이게 놓였고, 선수들은 모두 동시에 출발했으며, 관중들의 주목은 이기겠다는 결심을 갖도록 그들을 고무시켰다. 심판관들은 결승점 가까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시작부터 끝까지 경기를 지켜보고 올바른 승리자에게 상을 줄 수 있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불법적으로 제일 먼저 결승점에 도달하면 상을 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경기에는 큰 위험이 따랐다. 어떤 이들은 거의 상을 받기 직전에 쓰러져 죽는 일도 그리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평생 불구가 되거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경주자들은 크게 위험으로 여기지 않았는데, 이는 우승자가 받는 보상이 너무도 명예로웠기 때문이다. 우승자가 결승점에 도달할 때, 수많은 관중의 박수갈채는 대기를 찢고, 인근 언덕과 산에 메아리쳤다. 관중들이 모두 보는 가운데 심판관은 그에게 승리의 표상이면서도, 곧 말라 버릴 월계관을 씌워 주고, 그의 오른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려주었다. 이렇게 받은 월계관은 받은 사람에게 대단한 자부심을 주었다. 그를 찬양하는 노래가 온 나라 안에 들끓었다. 그의 부모도 영광을 나눠 받았으며, 그가 사는 도시까지도 그처럼 위대한 운동가를 배출한 덕에 크게 부러움을 샀다. 바울은 이 경기를 그리스도인 싸움에 있어서 눈에 띄는 예증으로 제시했다.


"경기장에서 여러 선수가 다 함께 달리지만 우승자는 하나뿐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우승자가 되도록 달리십시오. 우승자가 되려고 경쟁하는 선수마다 모든 일에 절제합니다. 그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고전 9:24~25). 그리스도인의 경주에서 승리를 얻으려면, 헬라나 로마의 경주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굴의 자세, 인내, 자기부정 등을 강화시켜야 한다. 비록 그들은 관중의 시선을 필요로 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바라서는 안 되며, 오락이나 사치, 안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주의를 흩뜨려서도 안 된다. 그의 모든 습관과 감정은 엄격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이성도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으로 깨우쳐져야 하며, 성령의 지도 아래 통제의 고삐를 쥐어야 한다. 모든 장애물은 제거되어야 하며, 어떤 짐도 그의 노정에 방해를 부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고전 :25). 우리 앞에는 시들고 말 월계관과 그리스도인 경주와 영적 전투에서 승리한 사람이 받을 불멸의 영광과 면류관이 극적인 대조를 이르며 놓여 있다. 거기에는 식지 않는 열정, 흔들리지 않는 걸음이 필요한데, 그것 없이는 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경주자들의 최후의 걸음은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한 고통스러운 노력으로 점철되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인도 결승점에 가까이 이를 때, 처음 시작할 때보다도 한층 더 단호한 결심과 열심을 가지고 앞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바울은 경주에서 우승자가 받을 시드는 월계관을 얻기 위해서도 반드시 따라야 하는 준비를 예로 들어, 그리스도인 경주에서 승리를 얻기 위해서 꼭 따라야 하는 규칙을 설명하고 있다.


곧 예비 훈련, 절식(絶食), 이런 것들은 세상 영광의 별것 아닌 보상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다. 절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영원한 이익이 걸려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식욕과 정욕을 이성과 하나님의 지배 아래 두는 것은 얼마나 더 중요한 일인가! 사람들이 썩어질 영광을 얻기 위해서도 그토록 기꺼이 어려운 일과 궁핍, 자기부정을 감수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과 하나님의 생명과 평행을 이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더 자원하여 고난을 참아 내야 할 것인가! 고대의 경기자들이 그토록 자기 부정과 엄격한 훈련을 하지만 꼭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상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수여된다. 그들이 죽을힘을 다해 달려서 영광의 면류관을 붙잡는 데 거의 도달하는 순간, 그토록 탐내는 보화를 순간적으로 다른 경주자에게 빼앗기는 경우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싸움에서는 사뭇 다르다.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경기가 끝날 때 실망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상을 받을 것이며,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이 이 그리스도인의 싸움인 생명의 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우주와 그 가운데 무수한 하늘의 천사들의 임금님께서 그리스도인 경주에 참가한 사람들의 수고를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계신다. 마르지 않는 활력과 흐트러지지 않는 진진함으로 위대한 경쟁에서 자기 몫을 다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수고에 따라 보상이 주어진다. 바울 자신도 영원한 생명을 상으로 받기 위해서 자기부정을 실천하고, 극도의 어려움과 궁핍을 참아 냈다.


그리고 그의 모본과 가르침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동일한 보상을 얻도록 인도했다. 그는 "그러므로 나는 목표 없이 달리는 사람처럼 달리지 않고, 허공을 치는 선수처럼 싸우지 않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은 내가 남에게 전도한 후에 오히려 나 자신이 버림을 당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고전 9:26~27)라고 말한다. 사도는 고린도의 형제들이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데 따르는 위험을 보도록 깨우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경기의 경쟁자로서 건강과 활력, 인내를 계발하기 위해서 엄격한 훈련과 절제를 실천했다. 그는 이 준비와 그 결말 사이 그리고 영원한 관심의 대상이 된 고린도 교인들의 자아 방종한 삶과 몸과 마음의 힘이 승리를 얻기 위해서 필요한 최대한의 체력을 대조해서 설명했다. 지금까지의 그들의 행습은 매우 비난받을 일이었는데, 이유는 심지어 식용이나 열정의 갈망을 부정하도록 이끌어 줄 영적 건강이나 복음의 영예에 대해 고려해 보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타락한 식욕에 탐닉해, 심지어는 우상 숭배의 축제에 이방인들과 연합해서, 새로 회심한 신자들의 믿음까지 위험에 빠질 처지였다. 바울은 그들의 동물적 탐욕과 욕망을 버리라고 권고하고 있다. 하나님의 솜씨의 걸작인 사람의 몸은 완전하게 잘 조율된 악기처럼, 조화로운 활동을 위해 건강하게 보존되어야 한다. 그는 그런 권고를 따라 자아를 지배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일, 모든 일에 절제를 행하는 일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 자신마저도 버림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사도는 그리스도인 경주를 불확실하게 달리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말하자면, 무관심하거나 의도적으로 뒤처지려고 하지 않았고, 마치 권투 선수들이 본 경기를 하기 전에 연습하는 것처럼 상대도 없는데 공중에 헛주먹질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 시합에서 처럼, 상대를 이기려고 싸웠고, 그의 대적을 반복적으로 잘 훈련된 주먹으로 제압하고, 땅에 쓰러뜨리고, 그가 승리했다고 인정받을 때까지 버텨 냈다.

 

이렇게 사도는 사탄의 유혹과 육적 본성의 악한 경향과 싸웠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순종할 때는 축복의 보상을 받고, 죄를 범할 때는 형벌을 받을 고대 이스라엘의 경험을 지적했다. 히브리인들이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의 보호를 받아, 애굽에서 나온 기이한 방법에 대하여 회상하게 했다. 그와 같이 그들은 홍해를 안전히 건넜으나, 반면에 애굽인들은 같은 방법으로 건너려고 시도하다가 모두 익사하고 말았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교회로 인정하셨다. 그들은 "똑같이 신령한 물을 마셨습니다. 그들은 이 물을 신령한 바위에서 마셨는데 그 바위는 그들과 함께하셨던 그리스도였습니다"(고전 10:4).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모든 여행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지도자로 모셨다. 얻어맞은 반석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사람들의 범죄로 인하여 상하셔서 구원의 시내가 만민에게 흐를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에게 보이신 은총에도 불구하고, 애굽에 두고 온 사치에 대한 갈망과 그들의 죄와 반역 때문에 하나님의 형벌이 그들에게 임했다.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스라엘의 경험에 내포된 교훈을 주의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 우리도 그들처럼 악을 좋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고전 10:6). 바울은 그토록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멸망하게 했던 우상 숭배의 죄와 방탕함, 분수에 지나치는 것들에 대해 경고했다.


안일과 향락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하나님의 확실한 징벌을 초래하는 죄악을 위한 길을 준비하였는지를 보여 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던져 버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들의 신으로 삼고 경배했으며,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 뛰놀았다. 많은 히브리인이 방탕에 빠졌던 때는 바알브올의 예배와 관련된 호화스러운 잔치에 참석한 후였다. 하나님의 진노가 일어났고 그분의 명령으로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전염병으로 죽었다. 사도는 고린도인들에게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십시오"(고전 10:12)라고 간청했다. 저희가 깨어 기도하기를 게을리하고, 자랑하고, 거만하게 된다면, 그들은 중한 죄에 빠지고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로 실망이나 낙담에 빠지게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들의 시험과 위험이 무엇이든지 간에 다음과 같은 보증을 주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여러분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여러분이 시험을 당할 때에 피할 길을 미련해 주셔서 감당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고전 10:13). 바울은 그들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감화를 끼칠 것인지를 스스로 살펴서 그 자체는 무죄할지라도 우상 숭배를 시인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거나,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양심을 거스르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도록 형제들에게 간청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고전 10:31). 고린도 교회에 보낸 사도의 경고의 말은 각 시대에 모두 적용되지만 특히 우리 시대에 적용된다. 그가 의미하는 우상 숭배는 신상을 숭배하는 것만이 아니요, 자신을 섬기는 것, 안일에 대한 사랑, 식욕과 정욕의 만족을 다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이 다 우상 숭배에 들어간다.


다만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진리에 대한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 사람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목과 기호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하며 방종을 따르는 신앙은 그리스도의 종교가 아니다. 세상의 정신과 조화되는 것은 거룩한 성경의 가르침과는 반대가 된다. 그리스도 교회의 교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세속적 쾌락의 관습이나 오락에 빠져 있는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의 원수와 연합체를 이룬 사람들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교회의 단순한 믿음과 조화를 광범위하게 떠나 있었다. 그들이 계속해서 예배로 모이기는 하지만 마음은 서로에게서 멀었다. 그들은 주의 만찬의 의미를 왜곡시켜서 상당 부분 우상 숭배의 축제를 닮아갔다. 그들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모이지만 그런 모임을 잔치와 자기만족을 위한 기회로 바꿔버렸다. 그것이 그저 습관이 되어, 사교적 식사를 위해서 성찬에 참석했다. 교인 가족들이 집회 장소에 자기들의 음식을 가지고 오는데, 다른 사람들이 준비도 되기 전에 먼저 먹곤 했다. 주의 만찬의 거룩한 의식이 부자들에게는 게걸스러운 잔치가 되었고, 가난 한 사람에게는 부요한 형제들의 비싼 음식에 비해 그들이 가져온 빈약한 음식이 얼굴은 붉히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집을 우상 숭배자들의 모임처럼 잔치와 환락의 장소가 되게 한 고린도인들을 책망했다. "여러분에게 먹고 마실 집이 없습니까? 어째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교회를 업여기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합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아닙니다. 나로서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고전 11:22). 헬라의 종교적 잔치가 이런 식으로 행해졌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형태를 모방해서 따라간 것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이 교사들이 우상 숭배의 잔치에 참석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런 비슷한 일이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벌어진 것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주의 만찬에 대한 명령과 반대 이유를 댔다. 그리고 이 거룩한 예식을 오용하는 것에 대해서 꾸짖었다.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분이 오실 때까지 전하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함부로 주님의 빵을 먹고 잔을 마시면 그분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자기가 받을 심판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고전 11:26~27, 29). 이와 같이 사도는 가장 단호하고 감명 깊은 방법으로 고린도 교회 안에 유행하고 있는 거짓되고 위험한 사상과 행습을 시정하려고 노력했다. 노골적으로 말하기는 했으나, 그들의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타일렀다. 그의 경고와 책망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에서 오는 빛이 그들에게 비쳐 생애를 더럽히고 있는 감추어진 죄악들을 드러냈다. 이 빛이 신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던가? 사도는 이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감정을 단단히 억제했다. 그 편지를 보낸 후 반응이 왔다. 바울은 그가 기록한 것이 덕을 베풀려고 한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더욱더 사이가 벌어질 것이 심히 두려워 때때로 그의 말을 철회하고 싶었다. 그는 떨리는 심정으로 그의 기별을 받아들인다는 회신을 기다렸다.


사도 바울처럼 사랑하는 교회나 기관들에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바울의 의기소침과 그의 자책감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시대를 위한 그분의 사업에서 짐을 진 하나님의 종들은 대 사도의 몫이었던 수고와 투쟁과 애타는 염려에 대하여 이해할 것이다. 교회 가운데 있는 분열로 번민하고, 동정과 지지를 보낸 사람들 중 어떤 이들로부터 배은망덕과 배반을 당하며, 악이 잠복하고 있는 교회들의 위험을 깨달아 죄를 책망하는 면밀하고 엄중한 증언을 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와 동시에 그는 머무나 가혹하게 다루지나 않았나 하는 두려움으로 가슴이 무거웠다. 십자가의 충실한 군병들은 이 세상에서는 쉴 곳은 찾을 수 없다.

 

저   자 : 엘렌 G. 화잇

출   판 : 시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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