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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리/바울의 생애

바울의 생애 // 17. 바울이 고린도를 다시 방문하다

by 동심초(남양주) 2022. 4. 7.

 17, 바울이 고린도를 다시 방문하다 

 제주도에서 

 

 

 바울이 고린도를 다시 방문하다 

바울이 다신 고린도를 방문한 때는 가을이었다. 바울이 멀리서 고린도의 탑들과 성을 바라보았을 때, 구름이 산을 가리고 산 아래 있는 도시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 마치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번영을 위협하는 오류와 부도덕에 딱 어울리는 상징처럼 보였다. 그는 복음 안에서 그의 자녀들을 만나러 왔다. 그들 중에 몇은 치명적인 죄를 저질렀다. 이전에 그의 친구들 중 몇은 초기에 그들이 가졌던 사랑과 따뜻한 우정 그리고 신뢰를 잊어버렸다. 그들은 원수가 되었고, 당신이 복음을 위탁받은 그리스도의 참사도냐고 따져 들었다. 교회의 대부분은 죄에서 떠나 바울의 명령을 따랐지만, 예전처럼 전적으로 그렇지는 못했다. 그가 이전에 방문했을 때처럼 교사와 백성들 사이에 연합과 사랑, 신뢰가 없었다. 교회 안에는 아직도 바울에게 책망받은 사람들 중에 악한 길을 고집하며, 그의 경고를 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앞으로 그가 할 일과 고집스러운 범죄자들을 개별적으로 다루겠다고 경고했다.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가 너희에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고후 13:2~3). 그는 반성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가는 일을 늦추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오류와 죄짓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교회로부터 분리시킬 때가 왔다. 그들은 바울이 그 영혼들을 위한 사랑 때문에 오래 참았던 것을 우유부단하고 나약한 탓으로 돌렸다. 이제 그들의 이런 탓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고린도에 가까이 접근하자 그가 이전에 사울로서 여행을 마칠 때와 기막힌 대조가 되었다.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행 9:1) 다메섹에 접근하고 있었다.


사울의 외모나 목적 그리고 정신이 바울과 이렇게도 다를 수가 있는가! 그때 그는 산헤드린의 대리자가 되어 세상 권력의 칼을 위임받아, 유대인 조사관으로 이단을 근절시키려고 투옥하고, 채찍질하고, 투석형에 처하려고 사람들을 찾아가고 있었다. 교만에 가득 차서 그의 명령에 따라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호송할 종들과 함께 다메섹으로 가는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발로 걸어가는데 외모로는 어떤 계급이나 권세의 증거도 없고, 그의 명령을 따를 어떤 공무원도 없었다. 그의 권위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처벌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저 여기저기 사람들에게 무식하고 타락한 사람 취급을 받는 사람들을 분리시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원수들은 그가 친히 나타나는 것에 대해 그의 몸은 허약하고 말을 별 볼일 없다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사도는 그들이 말한 대로 그렇게 무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왕 중의 왕의 위임을 받아 오고 있었다. 그의 무기는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죄와 사탄의 요새를 무너뜨릴 하나님을 통한 능력이었다. 사도에게는 그의 외모가 그렇게 된 것처럼 그의 정신에도 대단한 변화가 있었다. 전에는 "제자들에 대해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고, "교회의 파란을 일으켰고", "무론 남녀 하고 결 박하"였고, "그들에게 신성 모독하도록 강요"하였고, 예수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극도로 분"을 냈었다. 그의 마음에는 신랄함과 악의와 증오가 가득 찼었다. 실제로는 사탄의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 이제 사울의 교만과 열성적인 성질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변화되었다. 그가 가장 지독하게 반대하던 자들에 대해서 불쌍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들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생각이 그를 슬픔에 잠기게 했다. 그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기록했다.


"내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고후 2:2). 그들을 개별적으로 심하게 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간청했다. 사울의 품성에 남아 있던 것 중에 바람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마음에 불타고 있는 열정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순화되어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거룩하게 바쳐진 것이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갈 때 일단의 동역자들이 따라갔다. 그들 중에는 마케도니아에 있을 때 몇 달 동안 함께 있었던 사람도 있고, 예루살렘을 위해서 모금을 할 때 함께 있었던 사람도 있었다. 그는 현재의 문제에 대해 동정과 지원을 얻기 위해서 이 형제들에게 의존해야 했다. 그린도 교회에 어떤 점을 고통스럽고 실망스러운 것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쁨과 감사할 일도 있었다. 전에 부패하고 타락한 우상 숭배자였다가 이제 신실하고 겸손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도니 사람도 많이 있었다. 적지 않은 수가 아직도 사도를 따뜻한 애정으로 대하고 있었는데, 마치 귀한 복음에 있어서 장자로 태어난 사람 같았다. 다시 한번 이 제자들에게 인사하면서 그들의 진실성과 열성의 증거를 볼 때, 그의 수고가 전혀 헛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사랑하는 동반자들과 이 성실한 회심자들과 어울리면서 그의 지치고 고통스러운 영혼이 휴식과 격려를 받을 수 있었다. 바울은 석 달 동안 고린도에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그 도시의 교회를 위해서 지칠 줄 모르고 일하는 한편, 다 넓은 사명을 바라보기 위해서 그리고 새로운 정복을 준비하기 위해서 시간을 냈다. 그의 생각 속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로마까지 여행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알려진 세계의 대 중심지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게 세워지는 것을 보는 일이 그의 최대의 소망이요, 가장 소중히 여겨 온 계획 중의 하나였다.

 

로마에는 이미 교회가 서 있었고, 그가 이루어야 할 사업에 있어서 그들의 협조를 꼭 얻고 싶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아직도 그에게는 생소한 이들 형제들 가운데서 일할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그는 편지를 보내 로마를 방문하는 목적과 스페인에 십자가의 깃발을 세우고 싶다는 그의 소망을 알렸다. 바울은 로마인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 가운데서 그가 개인적으로 전하기 바라는 복음의 대원칙을 제시했다. 유대인과 이방인 교회들을 소란스럽게 하는 문제들에 대한 그의 입장을 진술했으며, 한때는 특별히 유대인에 속하였으나, 이제는 이방인에게도 제공된 소망과 약속들을 보여 주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를 매우 분명하고도 능력 있게 제시했다. 그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다른 교회들도 그 교훈으로 도움받을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의 말의 원대한 감화를 얼마나 희미하게 내다볼 수밖에 없었던가! 각 시대를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위대한 진리는 회개하는 죄인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든든한 등대처럼 섰다. 루터의 마음을 싸고 있던 흑암을 흩어 버리고 그에게 죄를 정결하게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나타낸 것을 바로 이 빛이었다. 동일한 빛은 죄 짐을 진 무수한 영혼을 용서와 평화의 참 근원으로 인도했다. 모든 그리스도인을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보낸 편지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다. 바울이 흥미와 희망을 가지고 서쪽에서 일터를 찾고 있을 때, 그가 이전에 일했던 동쪽 지역에 관한 심각한 우려를 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고린도에서 갈라디아 교회들로부터 온 소식을 들었는데 대 혼란 상태에 있으며, 심지어는 극단적인 배도까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유대화를 주장하는 교사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반대하고, 그의 수고의 열매를 파괴할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곳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교인 중에는 태생적인 유대인들이 있었다. 이 회심자들에게서 유대인 교사들은 준비된 접촉점을 찾았고, 그들을 통해 교회 안에 교두보를 만들었다. 성경 토론으로 바울이 가르친 교훈을 전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의 영향을 훼방하고 그의 권위를 약화시킬 가장 사악한 방법에 호소했다. 그는 베드로나 야고보처럼 예수의 제자였던 적이 없으며, 예수로부터 어떤 위임도 받은 적이 없고,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르친다고 주제넘게 나서면서도 실제는 다른 사도들과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것을 가르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여 유대주의의 밀정들은 많은 그리스도인 회심자를 그들의 복음 교사로부터 이간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점에 발을 디디고는 그들에게 구원에 필수적인 의식법을 준수하는 데 돌아오라고 유도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나 십계명의 율법을 순종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쳤다. 불일치와 이설, 관능주의가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에서 신속하게 뿌리를 내려가고 있었다. 바울의 심령은 이 교회들을 파괴하려는 악이 신속히 퍼지는 것을 볼 때 속이 되짚어졌다. 그는 즉시 갈라디아에 편지를 써서 그들의 거짓 이론을 드러내고, 믿음을 떠난 자들을 엄하개 꾸짖었다. 편지의 서두에 그는 자신의 사도직에 대하여 역설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을"(갈 :1)이라고 말이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높은 분으로부터 권위를 위임받았다. 즉 땅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받았다. 그들에 대한 인사를 마친 후 그는 이렇게 꼭 집어서 따졌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 :6). 갈라디아 인들이 받은 교훈은 어떤 면에서나 복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가르침이었으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사도는 이렇게 이어 간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갈 1:7~8). 그가 고린도에 보낸 편지와 갈라디아에 보낸 편지에서 따지는 내용이 얼마나 달랐던가!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서 크게 주의를 주고 부드러움을 나타냈다. 그러나 갈라디아에서는 갑작스럽고도 심각하게 비난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혹에 넘어가 있었고 교사들의 교활한 철학에 속고 있었는데, 그들은 진리를 왜곡시켜 잘못된 오류를 전했다. 그들은 혼동되고 당황해 있었다. 그들에게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교사들에게 매우 깊은 주의와 인내가 필요했다. 가혹하고 무분별한 언행은 유익을 주려는 사람들에 대한 영향을 망가뜨릴 수 있었다. 갈라디아 교회들에서는 공공연하고 정체를 드러낸 오류가 복음 기별을 대신하고 있었다. 신앙의 참기초이신 그리스도는 낡아 빠진 유대주의의 의식 때문에 사실상 포기 상태였다. 사도는 갈라디아 신도들이 저희를 위협하는 위험한 감화에서 구원받으려면 가장 결정적인 방법을 취해야 하고 가장 신랄한 경고를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러 환경과 조건하에 있는 사람들의 각기 다른 마음 상태의 사람들을 지혜롭게 다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깨우쳐지고 거룩하게 된 지혜와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리스도교회의 목사들은 그들이 유익을 끼치고자 하는 사람들의 상태에 자기의 노력을 적응시키는 것이다. 친절, 인내, 결단, 확고함이 모두 필요지만 이것들을 신중히 분별하여 행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종들에게 있어서 아직도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시련과 곤란한 문제들을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뿐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순결한 채로 전했다. 그의 가르침은 성경과 조화되었고, 성령께서 그의 수고를 지켜보고 계셨다. 이후로 그는 형제들에게 이미 들을 것과 배치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듣지 말라고 경고했다. 사도는 이전에 갈라디아 인들에게 알려 주었던 자신의 경험을 다시 회상시켰다. 자신이 유대의 학문을 배울 때 얼마나 진보가 빨랐는지 , 또한 그들의 종교에 얼마나 열성적이었는지를 회상시켰다. 나아가서 그가 한창 젊었을 때는 유대교 신앙의 유능하고도 열성적인 보호자로서 탁월한 지위를 얻었지만,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자 그 즉시 그의 촉망되는 영예와 유리한 점을 포기하고, 십자가를 저하는 일에 그의 삶을 바쳤다고 고백했다. 그의 형제들에게 이 모든 일에서 세상적이거나 이기적인 동기로 행한 것이 있었는지 여부를 판단하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그가 회심한 후에 어떤 사람의 도움도 받을 기회가 없었다는 것도 알려 주었다. 그가 전한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보여 주신 것이었다. 다메섹의 환상 이후에 바울은 하나님과 교통 하기 위해서 아라비아로 물러갔다. 삼 년 반이나 지나서야 그는 예루살렘으로 갔고, 거기서 머문 기간이 단지 15일에 불과했으며, 그러고는 바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나아갔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하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갈 1:22~24). 이처럼 그의 이야기를 회고한 후에, 사도는 복음의 위대한 진리를 깨닫고 붙잡게 된 것은 구약 성경에 나타났고, 그리스도의 삶에서 구체화된 것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나타나셔서 된 것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명확히 알리고 싶어 했다.


바울이 그처럼 엄숙하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갈라디아 사람을 경고하고 권면하게 된 것을 하나님에게서 받은 지시를 통하여 된 것이었다. 바울은 주저하거나 의심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라, 확고한 신념과 절대적인 지식의 보증을 가지고 했다. 그의 편지에서 그는 사람에게서 배우는 것과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교훈을 받는 것 사이의 차이점에 관하여 분명히 표현했다. 사도는 갈라디아 인들에게 그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한 거짓 안내자들을 떠나 진리와 지혜의 근원으로부터 받은 신앙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호소했다. 복음에 대한 신앙에서 그들을 떠나게 하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은 마음이 거룩하지 못하고 생애가 부패한 위선자들이었다. 그들의 신앙은 그것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리라고 기대한 의식들의 반복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는 말씀에 순종하기를 요구한 복음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와 같은 교리에 매달려 스스로 기만을 당하고 다른 사람들도 기만했다. 외형적인 신앙으로 마음과 생애의 거룩함을 대신하는 일은 사도들의 시대에서처럼 지금도 여전히 거듭나지 않은 자들의 호감을 사고 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도 거짓된 영적 지도자들이 있어서, 그들이 교리를 많은 사람이 열심히 듣는다.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함으로 구원을 얻는 소망에서 떠나게 하려고 애써 노력한다. 각 시대를 통하여 대적 마귀는 그가 기만하려고 하는 자들의 편견이나 기호를 통하여 유혹한다. 사도 시대에 그는 유대인에게 의문의 율법을 높이고 그리스도를 거절하게 하였으며, 현대에는 소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을 유혹하여 그리스도를 높인다는 구실 하에 도덕적 율법을 경시하고 그 계명을 범할지라도 처벌받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이와 같은 진리의 곡해자들을 확고하고 단호하게 대적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두려움 없이 그들의 오류를 폭로하는 것이 모든 하나님의 종의 의무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사도로서의 그의 지위가 사람에게 의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은 지금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을 선동하고 있는 문제들을 안정시키려는 것이고, 이방인들이 할례와 의식법을 순종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해결하려 했다는 것을 설명했다. 이것이 다른 사도들이 자기보다 우월한지를 판단하는 일을 유보한 유일한 경우였다. 그는 처음에 개인적으로 면담을 해서, 모든 문제를 지도자들인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 앞에 내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는 멀리 내다보는 지혜를 통해서 이 사도들이 바른 입장만 취해 준다면 모든 것을 얻게 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문제를 총회 앞에 제시했더라면, 감정 분열이 생겼을 것이다. 그가 이방인들의 할례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써 강한 편견으로 흥분 상태가 되어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방문 목적은 무산되고, 그의 유용성은 크게 손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 명의 주요 사도는 이런 흥분한 사람들의 편견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고, 그들 스스로가 참된 입장에 서서 그 문제를 총회 앞에 제시했으며, 전체의 의견이 일치하여 이방인들은 의식법을 순종할 책임에서 자유롭게 두기로 했다. 바울은 이렇게 원수들의 고소에 대해서 반증을 했고, 그가 예루살렘의 총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인정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이후에 이방인 가운데서 그의 사업에 총회에서 받은 인정을 적용했다. 그의 영향을 파괴하려 했던 자들은 교회의 기둥인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의 인정을 따르기로 공표했다. 그들은 이 사도들에 대해서 칭송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고는 그들이 바울보다 지위에서나 권위에 있어서 우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느라고 애를 썼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원수들이 이 사도들에 대한 거짓 태도가 그들이 하는 일의 정당성을 입증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을 신실한 그리스도의 일꾼들로 존경하는 한편, 그들이 사도를 가르치려 하거나 또는 그에게 복음을 설교할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가 이방인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과 베드로를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가도록 계획했다는 것에 대해서 그들을 확신시켰다. 이때부터 그들은 바울의 거룩한 위임에 대해 총회 앞에서 인정했고, 그를 그들과 동등한 동역자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를 증대하기 위해서였으며, 그의 사도직을 부정하던 사람들에게 그가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고후 11:5)고 말했다. 그의 부르심을 비하하고 그의 부르심이 그리스도를 대항해 싸우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애를 썼지만,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이 나타났다. 이때부터 그의 원수들의 반대와 심지어 그의 형제들의 행보가 그에게 자신의 지위와 권위에 대해 결정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했다.

 

저   자 : 엘렌 G. 화잇

출   판 : 시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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