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길
이교도들은 신앙을 고백하며 개종하였지만 단호하게 과거의 습관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우상숭배를 온전히 포기하지 않고 그 예배의 대상을 예수님, 마리아, 성인의 형상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가증한 이교의 누룩이 교회 안에 들어와 지속적으로 해를 끼쳤습니다.
건전하지 못한 교리와 미신적 예식과 우상숭배적 의식이 기독교의 신조와 예배와 혼합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이교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교는 부패하였고 그 순결성과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진리의 기수들
예수님은 감람산 위에서 사도 교회에 불어닥칠 고난을 미리 보셨습니다.
동시에 장차 암흑과 박해의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불어닥칠 맹렬한 폭풍우를 보셨습니다.
이 세상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하여 어떠한 일을 행할 것인지도 예고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주님이 당하신 것과 같이 온갖 굴욕과 비난과 고통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구주에 대한 증오는 구주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역사는 과연 구주의 말씀이 정확하기 성취되었음을 입증하였습니다.
땅과 음부에 권세는 온 힘을 다하여 제자들을 박해함으로 그리스도를 대적하였습니다.
이교도는 만일 복음이 승리를 얻는다면 그들의 신전과 제단이 소멸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전력으로 그리스도교를 박멸하려고 했습니다.
박해의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소유를 빼앗기고 집에서 내쫓겼습니다.
그들은 "고난의 큰 싸움"(히브리서 10장 32절)을 견디어야 했습니다.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히브리서 11장 36절)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들이 가진 증거로 인해 피를 흘려야만 했습니다.
귀인이나 노예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유식한 자나 무지한 자나 신앙 때문에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폭력을 상요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없애려던 사탄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신실하게 따르는 진리의 기수가 쓰러지더라도 복음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패배당한 듯 보였으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순교를 당했으나 하나님의 사업은 끊임없이 전진했습니다.
복음은 접근하기 어려운 곳까지 전파되어 로마의 군인들 중에도 믿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투옥되고 죽임을 당했지만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이 일어나 그들의 자를 채웠습니다.
이처럼 신앙을 위하여 순교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인정받고 승리자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은 선한 싸움을 싸웠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으로 인해 구주께 더 가까이 나아갔고 서로 간에도 더 친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보여 준 삶의 모본과 죽음의 증거도 계속하여 진리를 증언하였습니다.
사탄의 세력에 속했던 사람들이 순교자의 희생으로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습니다.
타협의 문은 열리고
사탄은 자기의 깃발을 그리스도교 내부에 꽂으려고 작정했습니다.
전에 폭력으로 실패한 것을 거울삼아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핍박을 그치고 대신 현세적 번영과 세속적 명예라는 교묘한 수단을 들고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들어온 우상숭배 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일부는 받아들이면서도 중요한 진리는 거절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의 변화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신앙을 위하여 자기들이 먼저 양보했으니 그리스도인도 양보를 해야 한다고 그럴듯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제 교회는 두려운 유혹에 빠졌습니다.
투옥과 고문과 불과 검은 이에 비하면 훨씬 더 큰 축복이었습니다.
몇몇 그리스도인은 타협할 수 없다며 진리에 굳게 섰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신앙의 원칙을 조금 양보하더라도 이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할 수 있으면 좋은 일이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그들을 온전한 회개로 인도할 수 있다고 자기 합리화를 하였습니다.
이때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충성된 제자들에게는 심각한 고민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라는 허울 좋은 외투를 입은 사탄이 교회 안에 들어와 신자들의 신앙을 타락시키려고 그들의 마음을 진리에서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표준을 낮추는 데 동의하여 마침내 기독교와 이교 사이의 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교도들은 신앙을 고백하며 개종하였지만 단호하게 과거의 습관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우상숭배를 온전히 포기하지 않고 그 예배의 대상을 예수님, 마리아, 성인의 형상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가증한 이교의 누룩이 교회 안에 들어와 지속적으로 해를 끼쳤습니다.
건전하지 못한 교리와 미신적 예식과 우상숭배적 의식이 기독교의 신조와 예배와 혼합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이교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교는 부패하였고 그 순결성과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미혹에 빠지지 않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하고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공언하는 자들 중에는 항상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한편은 구주의 생애를 연구하고 자신의 결점을 고치며 모본이신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한편은 자기의 잘못을 밝히 드러내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진리를 기피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가장 순결한 상태에 있을 때에도 모두가 참되고 순결하고 진실한 상태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주님은 고의로 죄를 범하는 자들을 교회에 받아들이지 않도록 가르치셨지만 그분은 흠이 많고 연약한 사람들과 친히 접촉하시고 그들의 허물을 깨닫고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빛의 임금과 흑암의 왕 사이에는 연합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제자들 사이에도 피차에 연합은 불가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교에서 반만 개종한 사람들과 타협하는 것은 점점 진리에서 멀어지는 길로 발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고 심히 기뻐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더욱 온전히 장악하여 마침내 그들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을 핍박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한때 참된 기독교 신앙의 옹호자였던 사람들만큼 그 신앙을 어떻게 대적할 수 있는지를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배도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충성된 자들은 무대에서 사라지고
이런 상황에서 견고한 신앙으로 흔들리지 않는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은 사제의 옷을 걸치고 교회 안에 들어오는 기만과 가증한 일에 대항하여 필사적인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성경이 신앙의 표준으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자우를 주장하는 교리는 이단으로 취급받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미움과 배척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랫동안 격렬한 투쟁 끝에 충성된 적은 무리는 배도한 교회가 거짓과 우상숭배에서 떠나지 않는 한 그들과 더불어 연합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하나님께 변함없이 충성하면서 평화와 연합을 유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원칙을 팔아서까지 화평을 살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진리와 정의를 포기해야만 일치 화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차라리 불화하고 투쟁해서라도 그것을 지키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충성심을 회복한다면 교회와 세상은 큰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디모데후서 3장 12절).
그런데 어찌하여 오늘날은 핍박이 거의 없을까요?
그 유일한 대답은 교회가 세상의 표준을 따라가면서 아무런 반대를 일으키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세상에 유행하고 있는 신앙은 그리스도와 사도 시대의 기독교 신앙의 특징이었던 순결함과 거룩함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세상에서 인기를 얻는다면 아마도 죄와 적당히 타협하는 정신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등한히 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앙과 능력이 되살아나면 반드시 박해의 불길도 함께 일어날 것입니다.
은밀하게 들어온 불법의 비밀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인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큰 배도가 있으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데살로니가후서 2장 3~4절).
사도 바울은 당시 교회 안에 오류가 들어와 교황권 설립의 길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법의 비밀이 처음에는 암암리에 그 일을 진행하였으나 나중에는 세력을 얻어 공공연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할 것이었습니다.
그는 기만적이고 신성모독적인 행위를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서서히 기독교 안으로 가져왔습니다.
교회가 이교의 극심한 핍박을 받는 동안에는 타협과 순응의 정신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박해가 그치고 기독교가 왕궁에까지 들어가자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겸손함과 단순함을 버리고 다신교의 제사장이나 방백들처럼 오만과 허식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율법 대신에 사람의 이론과 관습을 채택했습니다.
4세기 초엽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명목상으로 회심하자 일반 대중이 크게 환영하였습니다.
세속이 의의 두루마기를 입고 교회로 걸어 들어온 셈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부패는 급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겉으로는 이교가 정복을 당한 듯했지만 사실은 승리자가 되었고 그 정신이 온 교회를 지배하였습니다.
이교적 교리와 의식과 미신이 예배와 신앙에 스며들었습니다.
이교와 기독교의 타협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 위에 자기를 높이려는 사탄의 걸작이자 그가 이룩한 금자탑이었습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함으로 그의 속임수를 간파하고 그의 권세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구주께서도 사탄의 공격을 물리치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가탄이 도전해 올 때마다 "기록하였으되"라는 영원한 진리를 방패로 삼아 막아 내셨지요.
성경은 하나님을 높이고 유한한 인류의 운명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거룩한 진리를 감추거나 왜곡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로마교회는 수백 년 동안 성경 보급을 금지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고, 집에 둘 수도 없었습니다.
다만 지조 없는 교부와 감독들이 자기를 변호하거나 교리를 옹호하는 용도로 성경을 마우 오용하였습니다.
ㄱ=로마교회의 주요 교리 중 하나는 교활이 전 세계 그리스도교회의 눈으로 볼 수 있세 머리이며 세계 각지에 있는 감독과 성직자를 다스릴 수 있는 최상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교황은 하나님의 지위를 사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교황을 지상에 있는 하나니의 대리자요, 교회와 국가 위에 군림하는 권위가 가진 지도자로 일반들이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때와 법을 바꾸려는 시도
오류를 탐지하는 성경이 제거되었으므로 사탄은 자기 마음대로 활개 칠 수 있었습니다.
일찍이 선지자 다니엘은 그 세력이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다니엘 7장 25절)이라고 단언하였습니다.
로마교회는 그 신성 모독적 행위의 하나로 십계명에서 우상숭배를 금하는 둘째 계명을 삭제하고 숫자를 채우기 위하여 열째 계명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이교에 양보하는 이러한 정신은 더욱더 하늘의 권위를 무시하는 길을 넓혔습니다.
사탄은 교회의 경건치 못한 지도자를 통하여 십계명의 넷째 계명을 짓밟았습니다.
옛적부터 하나님께서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안식일을 폐하고 그 대신에 이교에서 "존경할 만한 태양의 날"로 지켜 오던 축일을 내세웠습니다.
이러한 변경이 공공연하게 추진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몇 세기 동안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참된 안식일을 준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존중하는 마음이 열렬하였던 그들은 율법이 결코 변개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고 그 율법의 신성한 정신을 열심히 옹호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자기의 대리자들을 시켜 교묘하게 활동하도록 하였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일요일에 집중시켜 그날을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날로 삼았습니다.
그날에 여러 종교적 행사를 가졌습니다.
당시만 해도 일요일은 단지 오락을 즐기는 날로 여겨졌습니다.
여전히 안식일은 신성하게 준수되고 있었지요.
본질성 이교도였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칙령을 발표하여 일요일을 로마 제국의 경축일로 삼았습니다.
개종 이후에는 본격적인 일요일 옹호자가 되어 그 이교의 칙령을 강제로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권위를 가지고도 안식일을 주의 거룩한 날로 지키는 것을 온전히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사탄은 마침내 거짓 안식일을 참 안식일과 동일하게 높이는 다른 방법을 택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칙령이 내린 지 몇 년 후에 로마의 감독은 일요일에 주의 날리라는 칭호를 붙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점점 일요일을 거룩한 날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계속해서 대회의가 소집되었고 회의가 거듭될수록 하나님이 제정하신 안식일은 낮추어지는 반면 사람이 만든 일요일은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 이교의 축제일이 거룩한 제도로 존중받고 성경상 안식일은 유대교의 유물로 전락하여 이를 준수하는 사람들은 저주받을 자로 취급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사탄은 전 인류에게 살아 계씬 참 하나님을 명백하게 가리키는 하나님의 유일한 율법을 변경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하게 하고 그분의 율법을 준수하지 못하도록 애를 쓰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드러내는 그 계명을 없애고자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개신교 측에서는 일요일에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으므로 그날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성서적 뒷받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나 그분의 제자들은 일요일을 결코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넷째 계명은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나타내고 또한 다른 거짓 신들과의 구별을 분명하게 합니다.
제칠일이 사람이 쉬는 날로 구별된 것은 창조 사업을 기념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안식일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존재의 근원이시요 존경과 예배의 대상으로서 사람들의 마음에 항상 기억하게 하기 위해 고안된 것입니다.
6세기에 이르자 교황권의 세력은 더욱 견고해졌습니다.
그 권위의 보좌를 제국의 수도에 정하고 로마의 감독은 전 세계 교회의 머리가 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이교 로마는 이제 그 지위를 교황 로마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용이 짐승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요한계시록 13장 2절)를 준 것이지요.
그리하여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1260년간의 핍박이 개시된 것입니다.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여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다니엘 7장 25절).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시리는 권세를 받으니"(요한계시록 13장 5~7절).
이에 그리스도인들은 지조를 굽히고 교황권의 의식과 예배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지하의 감옥에 갇히거나 고문을 받고 화형 주에 매달려 생명을 잃든지 양자 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누가복음 21장 16~17절)이라고 하신 예수님이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충성된 사람들에 대한 핍박은 더욱 격렬하여져서 온 세상은 마치 전쟁터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수백 년 동안 그리스도교회는 궁벽한 산간이나 인적이 드문 곳에서 그들의 피난처를 찾았습니다.
이미 선지자는 이 일을 예언하였습니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요한계시록 12장 6절).
암흑시대
로마교회가 거대한 세력으로 등극한 것은 암흑 시다가 시작된 다는 표시였습니다.
교회의 세력이 증가할수록 영적 암흑도 더욱 짙어졌습니다.
신앙의 참된 기초를 그리스도에서 로마 교황에게로 옮겼습니다.
사람들은 죄의 용서와 영원한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는 대신 교황이나 그 하수인인 교부나 감독을 더 의존하였습니다.
사제들을 하나님의 대리자요 중보자로 받들도록 가르쳐서 그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육체와 영혼에 엄한 벌을 받게 된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엄격한 종교의 규칙에 매여 숱한 괴로움을 받고 살았습니다.
더군다나 행위와 행함으로 죄를 속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피곤한 순례 여행과 고행, 유물 숭배와 제단, 수도원의 건립과 거액의 헌납 등 이러한 일을 실천해야만 하나님의 진노를 그치게 하고 그분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거짓을 유포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처럼 사소한 일에 화를 내시고 예물을 받으시거나 고행을 행하면 그 진노를 푸신다는 말입니까?
이때야말로 그리스도 교회에 있어서 위기의 시대였습니다.
진리의 깃발을 수호하는 신실한 기수가 매우 드물었습니다.
당시에는 오류와 미신이 세력을 장악하고 있어서 참된 종교는 이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복음은 자취를 감추었고 종교의 외양적인 면만 강조되었습니다.
개심하였노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들이 이교도를 감화시키는 데 필요하다며 그들이 철학에 집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용납할 수 없는 오류들이 마구 기독교에 침투하였습니다.
그중에 매우 위험한 이론이 사람은 우너래부터 불사불멸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육체가 죽어도 그 영혼은 죽지 않고 의식을 가졌다는 교리입니다.
이것을 기초로 죽은 성자를 위한 기도와 마리아 숭배가 성행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불신자가 최후에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당할 것이라는 이단설도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로마 교는 연옥설이라는 허구를 소개하며 어리석고 미신적인 군중을 위협하였습니다.
이 이설에 의하면 영원한 형벌을 받을 만큼 사악하지 않은 영혼은 범헌 죄에 해당하는 형벌을 연옥에서 받은 후 불완전한 상태가 정결해지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 교는 이렇게 신도들을 공포로 몰아넣어 돈을 벌고자 또 하나의 거짓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것이 면죄부입니다.
헌금을 교회에 내면 죄에서 자유를 얻되 자신뿐 아니라 현제 연옥 불에서 고통당하는 친구나 부모의 영혼까지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로마교회는 금고를 채우고 향락과 사치를 다하며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그리스도와 현저한 대조를 보였습니다.
성경에 근거를 둔 성만찬 예식도 미사라는 우상 종교의 의식으로 대체했습니다.
신부들은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했다고 근거도 없이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창조"할 권능이 있다고까지 공언하며 참람된 말로 하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이것을 거절하는 자들은 화형장에 끌려갔습니다.
교황권의 대낮은 온 세상의 도덕적 밤중이었습니다.
일반인뿐 아니라 성직자들조차 성경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예전 바리새인들처럼 로마교회의 지도자들도 자기 죄를 드러내는 진리의 빛을 싫어했습니다.
의의 표준인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리고 권력을 무제한 남용하며 거리낌 없이 악행을 자행했습니다.
온갖 기만과 탐욕과 방탕이 성행하였습니다.
부귀나 지위를 얻기 위하여 어떠한 범죄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교황과 감독의 궁궐은 극도의 방탕이 성행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리하여 수 세가 동안 학문과 예술과 문화의 모든 면에 걸쳐 어떠한 진보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나라는 도덕적으로 지적으로 마비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펴낸곳 : 시조사
발행인 : 황춘광
펴낸이 : 엄길수
편집인 : 박재만
편 역 : 최창현
원저자 : 엘렌 G, 화잇
전 화 : (02) 3299-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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